7/19/2016
길을 저버리는 자는 엄한 징벌을 받고 훈계를 싫어하는 자는 죽게 된다.
잠언 15:10
Discipline seems bad to those going astray, one who hates reproof will die
Proverbs 15:10
오늘부터는 칼리굴라에 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 대체적으로 로마에서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황제로 재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 그들을 지배했던 황제는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요?
로마의 실질적인 황제정은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부터 시작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들이 없었고 그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들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던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인 리비아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남편과 이혼시킵니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첫째 아들인 티베리우스를 정치, 군사의 모든 업무를 배우게 하며 중요한 인물로 키웁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시키고 자신의 외동딸인 율리아와 결혼시키며 후계자 구도를 완성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율리아는 간통죄로 추방당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유언장에 의해 티베리우스는 로마 2대 황제에 오릅니다. 티베리우스는 전차 경기와 검투사경기를 중단시키고 재정낭비를 막으려 노력한대신 시민들에게 인기는 떨어지게 됩니다. 뿐더러 10년간 카프리섬에서 은둔하며 통치를 근위대장에게 맡기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사람들을 믿지못하여 부하들을 무차별하게 처형하여 더욱더 인기를 떨어뜨립니다. 서기 14-37년 사이에 로마를 통치했던 그는 79세에 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그의 통치기간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외경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언덕을 오르실 때 예수님의 피묻은 얼굴을 닦아주었던 베로니카가 지니고 있었던 수건을 보고 병을 치유받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로마의 세번째 황제인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됩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즉위 당시 24살인 젊은 후계자인 칼리굴라는 아내와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됩니다.(그의 첫번째 아내인 유니아는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인기는 사상 최고였고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게르마니쿠스의 인기와 후광,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한 아픔 속에서 성장한 칼리굴라에게 환호합니다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긴축재정으로 풍요해진 국고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성대한 축하 행사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 기간동안 16만 마리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졌고, 새 황제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많은 양의 무료급식을 나눠줍니다. 또한 쾌락을 좋아하고 충동적인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두어들이던 0.5 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파괴된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인 보상 대책을 실행에 옮깁니다.아울러 주위의 아첨꾼들을 등용하는데 이때에 헤로데 아그리파 1세도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티나에서 정권을 잡습니다.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인 37년 10월쯤, 칼리굴라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칼리굴라가 병에서 회복된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밤마다 환청이 들리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정신이 이상해져 그 후부터는 미친 듯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운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옵니다. 또 자신의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하고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며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기행을 하는등 비정상적인 생활을 합니다.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합니다.
41년 1월, 칼리굴라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카이레아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가매장됩니다. 그리고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딸은 벽으로 던져저 머리가 깨져 죽게 합니다. 이후 여동생들에 의해 칼리굴라의 유해는 수습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됩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습니다.
주님, 폭풍우같이 파란만장하게 살다 삶을 마감한 한 인간의 슬픈 역사를 봅니다. 그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는 양심과 도덕을 무시하고 길을 저버리고 살았습니다. 그의 비참한 말로는 훈계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갔던 길을 쫓아가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주님, 신앙뿐 아니라 인생에도 정도를 걸으며 살아가게 힘을 주소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지 않게 지켜봐 주시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살아가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