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홈 로그인 | 메일재인증 | 업데이트 알림 | 회원가입 | 관리자 문의 |  사이트맵 |  26 (회원 0)  
ApacheZone
등록된 배너가 없습니다.
등록된 배너가 없습니다.
Home >  강론및기고 >  주일강론
 
작성일 : 13-11-05 12:13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루카 14장 15-24)
트랙백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460  
이글을 내twitter로 보냅니다 이글을 facebook으로 보냅니다 이글을 미투데이로 보냅니다 이글을 다음요즘으로 보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루카 14장 15-24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일어난 여러가지의 일들을 14장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했었지만 그들 중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지 않고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를 했고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하시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절에서 ‘그들’ 이라 함은 다른 바리사이들을 말하고 또한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은 6장 7절에서 처럼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어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달리말하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대해서 호의적이었지만 그지역의 모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배경에는 그 자리에 수종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는 지에 대해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6장 9절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침묵의 의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함의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서 안식일에 선한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을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고서는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윗자리를 좋아자지 말하는 말씀은 잠언 25장 6-7절과도 비슷합니다.  즉 초대를 받으면 스스로 윗자리에 앉을려고 하지말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윗자리를 앉을려고 하는 것은 교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그사람의 자리를 찾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려면 먼저 겸손을 실천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내가 보답을 받을 사람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잔치를 베풀 때는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사람들, 눈 먼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로서 그러한 초대에 보상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의인들이고 이러한 사람들은 부활 할 때 보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보상을 기대하는 사랑을 실천을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보답을 기대하는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심을 버려야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 다음에 오늘의 복음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말하고 그 잔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초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세상적인 이유를 대면서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이제 이 초대는 위에서 언급했던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 그리고 다리 저는 이들에게로 확대됩니다. 고을과 한길과 골목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개가 거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칭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대신에 그들이 죄이라고 멸시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초대에 응해서 자리를 차지했지만 여전히 자리가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완수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의도적으로 거절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초대에 응할 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쓸데없는 애착이나 집착을 버릴 때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떠한 세상적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초대에 응하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하루입니다. 



이글을 내twitter로 보냅니다 이글을 facebook으로 보냅니다 이글을 미투데이로 보냅니다 이글을 다음요즘으로 보냅니다  

 
   
 


굿뉴스 Diocese of Austin 마리아사랑넷
이용약관 |  개인보호정책 |  광고안내 |  온라인문의 |   로그인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Korean Catholic Church at Austin, Texas | 6523 Emerald Forest Drive, Austin, TX 78745 | Phone:(512) 326-3225
Copyright ⓒ www.kcc-austin.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