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은 성실한 삶에서
온다.
루카복음 12장 41-47
성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사람과의 차이는 ‘항구함’의 차이일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주인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삶의 양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위선자들과 진실한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과
겉만 번지르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산다는 것’
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주인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항상 긴징하면서 피우는 게으름입니다. 하지만 성실한 사람의 경우에는 육체적으로
조금은 피곤할 지 모르지만 언제나 마음이 편합니다.
언제나 주인이 올지에 대해서 신경을 써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빨리 주인이
와 주기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반갑게 맞기 위한 기쁜 준비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 우주만물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그 직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주인이 집사에게 자신의 재산과 하인들을 잘 관리하라고 명하고 주인이 떠났을 때 성실한 집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을
성실하게 잘 실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이제 주인은 자신의 집사를 더욱 신뢰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맡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참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추구함에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바로 나의 삶의 매 순간 순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적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체험은 먼저 내가 실천함에서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보면 내가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서 8년동안 일곱번이나 1위를 차지한 삐에르 신부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한 분이십니다. 그 신부님의 비망록 중에서 "단순한 기쁨"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 신사가 자실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문을 구합니다.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신부님께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 모든 상황으로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되네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나서 "그리고,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리고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하면서 신부님을 돕기로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그 신부님이 하고 있는 일을 옆에서 돕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내가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행복은
바로 이러한 행복을 말할 것입니다. 성실함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소유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지 않는 삶, 남에게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서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참 행복을
주지 못함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위의 젊은 청년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삶마저 포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남에게 보이는 삶이 아닌 참으로 나누는
삶을 살면서 참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