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머뭄’과 ‘떠남’이라는 두 단어의 연속적인 체험 속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꾸려 나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머뭄’에서 ‘떠남’을 체험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자신이 안정적으로 있던 곳에서 이제 낯선 곳으로 이동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그러한 어려움을 무의식적인 울음으로 표현 했는 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안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의 자리로 옮기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의식적인 옮김과 타의적인 옮김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인과 같이 게으른 사람은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지금의 상황보다 새로운 상황이 본인에게 주는 엄청난 메리트가 없으면 옮기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를 의식적으로 찾아 가는 사람들은 모험정신이 투철하고 호기심이 많거나 이에 덧붙여 부지런함이 겸비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수도자나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목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 곳 저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는 열려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 가운데도 본인과
같은 예외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당시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순수한 열정이 퇴색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좀 더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 등등의 ‘좀 더…’
하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슴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좀 더…’하는 삶이 몸에 배여 있기에 가난하고 환경이 나쁜 곳에서 주님을 전하면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며 살아가는 선교사분들이
존경스럽고 그분들에게 더욱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제가 못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명령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 같으면 억지로 할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러한 수동적인 삶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을 전하는 삶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러한 ‘좀 더…’ 하는 삶보다 ‘좀 덜…’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머뭄’의 삶보다는 ‘떠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떠남’의 삶은 포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포기가 누구를 위한 포기이며 무엇을 위한 포기인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포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도록 창조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예수 회원은 언제나 자신의 한쪽 발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말씀이 기억납니다.
한 발을 들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항상 움직일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각적인
출발의 준비’는 바로 전적인 포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바로 ‘주님께로의 의탁’을 전제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느님때문에 ‘머무’보다는 ‘떠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상에서 부를 쌓는 삶이 아닌 하늘나라에 부를
쌓는 삶을 기쁘게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