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루카 8장21)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우선순위에 누가 가장 윗자리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에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서 왔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육적인 부모와 형제들에게 사랑이 없으셨겠습니다. 당연히
우리보다 더욱 깊고 넓은 사랑을 갖고 계셨고 이를 실천하셨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실천 방법이 달랐을 뿐이십니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사랑으로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예수님은 더 넓고 깊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고려해서 사랑을 실천하시는 분이심을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구절에
신경이 쓰입니다. 이 ‘듣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들음’을
강조하실까?
잘 듣기 위해서 우리는 들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행한다’는
것은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하기에 들은 말씀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모와 형제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들음과 실행’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형제요 부모임은 달리 표현하면 형제와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즉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이 나의 부모와 형제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슴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삶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육적인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에서의 인간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는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고 또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야 1장 11절과 12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는데 그리고 성당에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을 했는데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을 살면서 그
순간 순간마다 참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참된 부모와 형제도 함께하고 있슴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냐를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육적인 경계도 없었습니다. 당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당신의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도전에 그
도전의 의미를 잘 깨닫고 잘 응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