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
루까12:49-53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항상 밝음과 행복의 삶이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복음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주는 행복을
포기하는 아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불은 타서 없어질 것들과 영원히 남을 것을 구별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은 없어질 것은 태워 없애버리고 영원히 남을 것은 더 순수하고 강하게 단련을 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고 하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신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거짓되고 헛된 것들이 드러나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이 밝혀지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예” 아니면 “아니오”를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순간과 영원의 기로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성령을 통해서 밝음과 어둠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밝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의 목적인 하느님나라의 완성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명이 끝났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가장 힘든 일,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려 오셨지만 당신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기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시며 고뇌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 라는 이 말씀은 당신의 이러한
고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세례는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서 받으신 것과 같은 그런 세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코10:35 이하에 보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서 요청하기를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 하셨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되물으신 말씀이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는 세례"라는 말을 "내가 마시는 잔"이라는
말에 이어서 나란히 언급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받으실 세례는 곧 그가 마실 잔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마실 잔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 정도로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며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26:36-39) 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잔은 십자가의
잔,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잔이 곧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려고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상에서 내어 놓으셨다면 우리 역시 이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수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이제 우리는 부활을 위해서 당연히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않됨을 압니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이 갈라서고 가족이 파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아픔과 갈등이 바로 영원한 하나됨을 위한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