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5주간 강론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 2-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1베드 2, 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 11)
이성으로 이해할려고 하는 사람과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평행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접점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아무리 사실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고 하다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이러한 이해 없이도 믿고 따라옵니다. 특히 부모들을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봅니다. 이들은 엄마를 따라다니는 것이 피곤하고 또 피곤하기때문에 보채면 야단을 맞으면서도 따라다닙니다. 결국에는 엄마를 따라 다니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결과를 갖고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친자관계가 백프로 성립한다는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분들의 사랑에 그냥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관계일 것입니다. 따짐이 없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성적인 따짐이 시작됩니다. 이분들이 정말 나의 부모가 맞을까 하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이러한 긴장관계가 있었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으라고 하지만 토마스는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논리적인 최선의 설명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답함이 저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토마스와 필립보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과 공기가 늘 우리 주변에 있기에 이들에 대한 중요성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이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깨끗한 물과 신선한 공기를 위해서 막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로 늘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의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빨리 깨어나도록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시면서 다시한번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성령강림 후에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합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말씀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일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로 변화되어 갑니다. 공동체원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과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다가 이제는 세상적인 눈으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세상적인 원칙을 따짐이 아닌 하느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전념하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언제나 사탄의 전략에. 당연히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은 이러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1, 28). 그런데 사탄은 매순간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있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전략을 잘 아는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살아있는 돌이신 즉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신 주님(1베드 2, 4)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창세 28장 16)“하는 야곱처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유한함을 깨달아 갑니다. 성숙함이란 자신의 유한함을 깨달아감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함은 이러한 자신의 유한함을 깨달으면 그곳에서 멈추거나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극복의 과정 속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믿음이 있으면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하게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