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강론
요한 4, 5-42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많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영광 만이 참 영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인생의 쓴 맛보다는 단 맛을 더 좋아하고 단 맛을 보기위한 쓴 맛의 체험을 피할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약한 모습을 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통에 좌절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노예생활에서 방금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힘듬에 자신들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 목적지 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정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노예시절이 더 좋았다고 도발합니다.
당시의 최고의 지도자이고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를 만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당시에 가장 버림받고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했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서 우물가에서 만나십니다. 가진자는 스스로 당신을 찾아와서 만나게 하시고 약한 자는 당신께서 그러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인간과의 만남의 원칙입니다.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아가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십니다.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접근을 해야 하나를 가르쳐주십니다. 희망이 없던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약속하십니다.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녀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요셉성인이 마리아를 보호하시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여인이 갖고 있어던 고정관념이 깨어져 버립니다. 이제 이 메시아를 전하기 위해서 삶의 현장으로 갑니다.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신학자들은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 자신과 비교합니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의 모습을 시편 작가는 이렇게 보도합니다. 시편 90장 3-6의 말씀입니다.
3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4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5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6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이고 죄 많은 존재인가를 알게 합니다. 죄만 보면 죽어야 마땅한 존재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께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관대함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감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였으면 합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구세주이심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살았으면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 뵙고 동네로 가서 소문을 퍼뜨립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왔으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믿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