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교회는 시월의 마지막 전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제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삶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몸을 돌보지 않고 투신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지금 교회내에서는 ‘선교’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교회를 알리기 위해서 거리로 나가서 팜플렛을 이웃에게 돌리거나 일반 언론매체를 사용해서 광고를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선교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의 언론을 통해서 선교에 성공한 사례들을 읽거나 보기도 합니다. 대개의 경우는 위에서 언급한 외적인 선교 방법을 통한 효과에 국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의 효과 이면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입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처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를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가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 있음과 동시에 떠나게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 가느냐에 따라서 크게 좌우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교’는 불림을 받은 특정 몇 사람의 전유물인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신자는 바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아는 바와같이 평신도 사도직에는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이 있습니다.
‘왕직’이란 주님께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대접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분의 모범을 따라서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직’이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제직’은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원할하게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사제직’의 수행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의 구체적인 의미의 근원은 바로 사도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원래 그리스어 어원은 ‘누구로부터 보내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도(아포스틀)라는 말에는 파견한 사람이 존재하고 파견자로부터 사명을 받고 그리고 파견자의 현존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할 때에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선교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러한 사랑과 용서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이를 선포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기도 안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기 위해서 어느 한 순간도 주님이 나에게서 떠나시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는 이웃이 우리로부터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하는 필수조건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