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강론
두 아들의 비유 (마태 21, 28-32)
2014년 9월 28일 일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열려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과 닫혀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려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실수나 잘못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닫혀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사람은 바로 열려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의 원인을 타인에게로 돌리는 사람은 닫혀진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대상은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입니다. 이들은 가장 엄격한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모든 전례 규정을 엄밀히 지켰던(마태 23,13-32 참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하하면 쉽게 그 뜻에 ‘예’라고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이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그분을 반대하고 심지어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기까지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는가? 하는 질문에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윗이 바세바와 정을 통하고 난 뒤에 나탄이 찾아와서 비유로 다윗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다윗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잘못한 부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올바른 대답을 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만 목적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맞추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열심히 심신단체 활동을하고 피정이란 피정은 다 쫓아 다니지만 실제 삶은 변함이 없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세리들이나 창녀들입니다. 이들은 시작은 복음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바로 그들에게는 기쁜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길 잃은 양들을 위한 것이었슴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병자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자만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에게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머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31절).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 또 기념비가 기리는 자들의 궁전들은 모두 묻혀버렸으며, 도시를 점령하고 전승탑을 세우며 많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자들은 석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지만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창녀였으며 어떤 나병환자의 집에서 예수께 기름을 부었던 여인은 전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고 있다.”는 말씀이 가까이 다가오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