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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02 20:17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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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863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12월 3일)
- 화가 루벤스의 작품으로 성인을 만나다

'지도 밖으로' 행군한 아시아 선교사



- 루벤스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8, 캔버스에 유채, 395㎝ⅹ535㎝). 망망대해를 헤치고 나가 미지의 땅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하비에르의 선교 업적을 기린 작품이다.
 

계단 위 테라스에서 이교도의 우상들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하늘의 빛에 쓰러진다. 그 아래에 아기를 안은 인도 여인, 정수리까지 머리를 깎은 일본인, 곱슬머리 흑인 등 많은 이교인이 모여 있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루벤스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8년)이다. 선교의 수호자 하비에르(예수회, 1506~1552)는 난간 기둥에 올라서서 그동안 이들이 모르고 살았던 신, 즉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 뿌린 대장정
 
하비에르야말로 '지구 밖으로 행군한' 위대한 선교사다. 성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설립한 하비에르는 1541년 4월 포르투갈 리스본항에서 무역선을 타고 아시아로 향했다. 유럽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시아에 대해 잘 몰랐다. 몽골군이 유럽 코앞까지 진격하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땅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동부 모잠비크에서 겨울을 난 후 1542년 5월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1년 하고도 29일이 걸렸다. 그는 아시아인들의 언어와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12년 동안 고아에서 시작해 실론(스리랑카), 몰루카제도(인도네시아), 일본 가고시마와 나가사키, 중국 상천도까지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그를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라고 부른다. 그의 선교 대장정은 유럽과 아시아에 문명교류의 첫 번째 다리를 놓았다는 점에서도 기억할만하다. 

그는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동안 수십 번도 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막막한 심정과 외로움에 절망하기도 했다. 특히 낯선 문화는 항해 중에 만난 폭풍우보다 더 상대하기 버거운 난관이었다. 

"만약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1542년 로마 예수회 본부에 보낸 편지) "(일본에 도착했으나 언어를 몰라) 우리는 정말 말 못하는 동상처럼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1549년 가고시마에서 쓴 편지)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보면 일본 선교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이 득시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얼음 같은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림 속 한복입은 남자 정체는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아시아를 복음화하려면 중국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아시아는 풍습부터 사상까지 모든 게 중국 영향권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광동성에서 14㎞ 떨어진 상천도라는 섬에서 열병으로 쓰러졌다. "하느님께서 10년만 생명을 연장해 주신다면 나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선종 당시 46살이었다. 

유해는 아시아 첫 기착지인 고아의 봄지저스(Bom Jesus)대성당 석관에 안치됐다. 놀랍게도 46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유해가 거의 원형 상태로 남아 있어 순례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성화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비에르 발치에서 몸을 옆으로 돌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한복 입은 남성이다. 이 남성은 루벤스의 스케치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과 동일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이탈리아 상인에게 팔려 유럽 땅을 밟은 최초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설이 유력하다.
 
[평화신문, 2012년 12월 2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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