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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24 21:11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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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053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근대의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또는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 중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다. 성인(聖人)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중요한 교의는 그 후 약 400년 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히고 공식으로 천명하게 되는 진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9~42항 참조)이다. 먼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탈리아의 국경에 접해있는 프랑스 동남쪽 사보아 지방에서 1567년 8월 21일에 명문가 드 살르(de Sales) 후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는데 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모친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인성 및 신앙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프란치스코는 지방의 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빠리에 유학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끌레르몽 대학에서 6년 동안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신앙의 일대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은 그가 당시 파급되어 있던 칼뱅의 운명 예정설에 사로잡혀 자신이 혹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예정된 것이 아닐까 심히 번민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체험이다. 그 때 그는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상상에 빠져 들어가면서 크게 고뇌했던 것이다. 그는 이 고통스런 상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으나 벗어나기 어려웠고 점점 더 깊이 우울한 환상에 사로잡혀 나중엔 온갖 신심이 한낱 기만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성모님 상 앞에 꿇어 기도하던 중 종신토록 정결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했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마음의 폭풍우가 홀연히 진정되고 감미로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됨을 느꼈다. 이러한 어둔 밤의 체험은 훗날 그가 사목 활동 중 어두움 속에 헤매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며 도와주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빠리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는 부친의 원의에 따라 유명한 법학부를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의 빠도바 대학으로 옮겨가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법 뿐 아니라 또한 신학 공부에도 계속 열중하였다.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의 불충분함과 허전함을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이 끌리던 사제 생활에 대한 성소를 그 때에 더욱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1592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샨 베리 시(市)의 원로원의 법률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부친의 주선으로 그는 원로원 의원직 취임 교섭까지 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가 걸어야 할 길과 수행해야 할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소망을 채워주지 않아 실망스러워 하던 부친에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허락해 주길 간곡히 청하여 결국 부친을 설득하였고 이로써 그에게 사제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1593년 12월에 프란치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고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봉사하였다. 교구의 장상이 샤블레의 칼뱅파 교도들을 다시 성교회로 귀의시키기 위해 선교활동 할 사제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그는 많은 위험과 곤경 중에도 굴복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들의 귀의를 위해 온갖 정성과 방법들(동기는 선의였으나 비판받을만한 방법들도 활용했음을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임)을 동원하여 투신하였으며 결국 7만이 넘는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602년에 즈네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장으로서 그리고 사목자로서 교구쇄신을 위한 폐습의 교정과 조직 개편,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여건 조성과 장려, 쇄신적 사제양성을 위한 배려, 수도생활 쇄신을 위한 독려, 영적 서적들의 저술, 영적 지도 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교구 내 산재해 있는 벽촌들을 끊임없이 순회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 집전과 교리교육 등 헌신적인 사목 봉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자주 사제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들과 친교를 이루고 그들이 사도직에 더욱 충실하며 기쁨에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단으로 황폐해졌던 그의 교구가 얼마 후엔 프랑스에서 가장 열심하고 모범적인 교구가 되었다.
 
1607년엔 성녀 요한나 샹딸과 함께 성모 방문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 수도회는 봉쇄 공동체였는데, 심한 육체적 고행을 회칙으로 명하던 종전의 수도회들과 달리,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인들도 입회할 수 있도록 수덕 행위를 덜 엄격하게 조절 완화하였다. 완덕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은 육체적 고행보다 정신적 희생 즉 자신의 뜻을 떠나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일치하는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견해를 따랐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그해부터 11년 후(1618) 11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빠리에 용무가 있어 머물게 되었는데 시민들은 이 유명한 대 강론가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매일 성당에 운집하였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빠리에 상주하기를 간청하였다. 그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자선사업의 사도이며 프랑스 성직자들의 쇄신 활동가로 유명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친교를 맺은 것이다. 그는 빠리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의 영적 지도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에게 부탁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성은 그의 저작 총 27권 안에 풍성히 담겨있으나 특히 신심생활 입문과 신애론(神愛論) 그리고 영적 담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12권에는 영적 지도를 위해 그가 썼던 2100여 통의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과학, 예술 및 프랑스어의 연구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안느시에 플로리몬타느 아카데미를 세웠는데 그것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태어나기 30년 전 일이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622년 겨울에 리옹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그의 나이 56세이던 1622년 12월 27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안느시의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1665년에 교황 알렉산더 7세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시성을 통하여 성인품에 올렸으며, 1877년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좥교회의 박사좦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비오 11세는 그의 문학적 능력과 공헌을 높이 기리며 그를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6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2)


2. 영성사 안에서의 역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혼자서 하나의 영성학파를 형성하여 교회의 유익에 기여함으로써 영성사 안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다. 학자들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프랑스의 르네상스로 하여금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화 하도록 하였고, 인문주의가 경건하게 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와 근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완덕, 성성, 수덕 및 신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방향 제시 등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을 미친 이들 중의 하나이다. 

1)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심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은 참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약 4세기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성과 성화 및 영성의 다양성 교의를 앞서 밝힌 것이다. 그는 수도자 뿐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계층의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며 수덕과 성화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2)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평신도의 영성에 관해 가르치고 글을 쓰게 된 최초의 영성 작가이다. 그 때까지 영성은 관상 수도자적 완덕의 삶으로 제한, 이해되고 있었기에 세상에 사는 평신도들에게는 요원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에 관한 저술가들은 속세와 관계를 끊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썼으며 또한 영성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속세와 관계를 끊는 수덕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세상에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지내면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영적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여러 세기 동안 제한적으로 이해되고 제약되어 온 수도생활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갖도록 하였다.

3)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쓴 「신심생활 입문」은 이미 2세기 앞서 쓰인 「준주 성범」과 함께 교회 안에서 필독서로 추천되고 아장 많이 애독되어 온 영성생활 지침서이다. 

1619년 「신심생활 입문」의 완성판이 출간되자 불어권 지역에 금방 널리 보급되었고, 그의 생애 중 40판 이상 인쇄되었다. 이책은 당시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들 뿐 아니라 대다수의 성직자, 수도자들한테 높이 평가되었다. 프란치스코 주교를 늘 존경하던 왕 앙리 4세는 이 책이 자신의 기대를 훨씬 초월한 걸작이라고 격찬하였으며 왕후는 이 책 한 권을 금강석으로 장식하여 영국 왕에게 보냈다. 그 책은 곧 18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빨리 전파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대변천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의 신자들로부터 고전적 신심서로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준주 성범」이 수도자적 완덕의 길을 위한 지침서라면, 「신심생활 입문」은 평신도 를 위한 영성생활의 안내서이다. 「준주 성범」이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지 않은 유익을 주는 고전적 교과서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고독과 침묵 중에 복음 권고 덕의 서원을 지키며 완덕의 길을 걷는 수도자의 규범서라고 한다면, 한편 「신심생활 입문」은 수도자들을 위해 유익한 영적 입문서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세상 안에 살고 일하며 봉사하는 평신도들에게 참신한 영성을 제시하는 교본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문장은 이해하기 쉽고 흥미를 끌면서도 세련미를 갖추고 있고, 그의 영적 가르침은 온전하고 중용적이다. 

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회원들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영성실천에 있어서는 다분히 이냐시오적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세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필립보 네리의 작품들에 정통했고, 수덕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스페인학파의 저자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요한, 그라나다의 루도비꼬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사망 근 두 세기 후인 1859년 성 요한 보스노는 수도회를 창설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라 부르며 그를 수호 성인으로 모셨다. 요한 보스코는 수호 성인의 영성 뿐 아니라 저서들을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를 수도회원들의 모범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5)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가톨릭 신앙생활에서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지성에 치우쳐 신심행위가 타성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을 반성하고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인간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해주는 이성(異性)을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여겼지만, 신심이란 정적 생활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에 신심 생활을 위해서 정적 측면을 소중히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장려하게 되었으며 차차 교회 안에 예수 성심 공경이 파급되어 갔다. 

그가 설립한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예수 성심 신심의 사도 성녀 마리아 알라꼬끄(1647~1690)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6)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경건한 인문주의 사상을 통해 17세기 프랑스 교회와 그 주변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거기엔 인문주의가 한 몫을 하였다. 자연과 학자들의 운동으로서 인문주의 뿐 아니라 진리의 미적 표현을 추구하는 교양 운동으로 이해되는 인문주의 방향도 그리스도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고 하였다. 인문주의는 인간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 정신의 감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인문주의의 분리는 어느편을 위해서도 유익한 결가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성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경우 영성생활에도 중요부분을 잃게 되며, 한편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포기할 경우 그 기반과 전통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인물이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두 가지가 내적으로 상반된다고 믿지 않았다. 여러가지 대립을 화해시키는데 특별한 소질이 있던 그는 조화적인 성품으로 두 운동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자연과 초자연을 화해시키며 속된 영역과 거룩한 것에의 노력을 통일시키려는 그의 새로운 신심 이상은 바로 인문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에 있었다. 그것은 「경건한 인문주의」또는 「그리스도적 인문주의」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신앙적 기반 위에 선 인문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옴에 여러 형태와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인문주의적 신심운동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를 신심행위에 유용하고자 노력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페츠라르카, 에라스무스 등이 이미 형성한 전통의 계보에 속한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13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3)


3. 인성 · 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 

「온유함의 성인」혹은 「신사 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해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인성, 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제1단계

젊은 사제 프란치스코는 샤블레 지방의 칼뱅주의자들을 개종시키는 임무를 자원해 맡으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서적 외판원처럼 집집마다 돌면서 문틈으로 자신이 쓴 전도지를 밀어 넣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강론하는 등 2년간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결실은 겨우 열 아홉명이 개종자였다. 그는 시몬처럼 이렇게 푸념할 수 밖에 없었다. 

『주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루가 5,5)

▲ 제2단계

결실이 미흡하자 그는 선교방법을 바꿨다. 공권력을 선교에 이용하여 억지로라도 데려오는 방법(루가 14,23 참조)을 택하고자 한 것이다. 사보아의 공작이 자신의 속령인 샤블레 지방에서 공권력 행사에 동의하였다. 군주로서 그는 칼뱅파의 설교자들을 추방하고 신도들을 공직 채용에서 제외시켰으며 그들의 성서를 압수했다. 프란치스코를 대동하고 공작은 주민들을 광장에 집합시켜 칼뱅파의 신앙을 고수할 사람은 그 지역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강압적 방법은 샤블레 지역의 사람들 2000여명은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선의에서 행한 것이라 변호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큰 피해를 주며 안타깝게도 구원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다고 믿었던 프란치스코에게 혈기 왕성한 정의감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수적으로 볼때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방법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몬과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할 입장이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끈 매력적 온유함과 설득력을 갖추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길고 엄한 자기 수련의 인고의 과정이 요청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애 중 가톨릭 교회를 떠났던 칼뱅주의자들 7만 여명을 귀의시킨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여기엔 영욕(榮辱)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 제3단계

그는 천부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였다. 사도적 열성이 그를 사로잡아 그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주교로 축성된 후 사도적 방향을 바꾸었다. 이교도들은 개종시키는 선교보다 우선 교회 안에서 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 목표는 냉담한 신자들의 무관심을 일깨우고 해이해진 신자들에게 신앙을 견고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신앙을 선포하는 기존 방법을 바꿔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따라서 무엇보다 교리 교수법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신심의 다양성과 수덕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면서 모든 신분과 직업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완덕에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나 그의 가르침을 참신한 방법으로 서술한 「신심생활 입문」은 프랑스 뿐 아니라 주변 여러 나아에 선풍을 일으켰다. 

▲ 제4단계

프란치스코는 인격적, 영적 발전에 큰 영향을 받은 한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녀 요한나 샹딸과의 우정관계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녀의 우정 관계는 성인들 사이에서 가끔 있어온 일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요한나 샹딸의 우정은 성인들의 세계에 있어서도 매우 새로운 사건이어서 어떤 범주에 분류해야 할 지 당혹스럽다. 이 두 성인을 서로 연결한 독특한 체험은 프란치스코 뿐 아니라 요한나 역시 비상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디죵 시 부르궁디 의회 의장의 딸이었으며 샹딸 남작의 미망인이던 요한나는 1604년 32세 때 마침 디죵 시 친정에 머물러 있던 동안 그 곳에 사순절 강론을 하러 온 프란치스코 주교를 처름 만났다. 

이 때부터 두 성인 사이에는 세상에서 드문 우정이 맺어졌다.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관계가 용납될 수 있는지 대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식별하느라 분투하였으며 결국 하느님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믿었다. 요한나는 총 고해를 한 후 프란치스코의 모든 지시에 순종하기로 서원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항상 그녀를 사랑 안에서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영혼이 그녀에게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오늘 가톨릭 교회에서 생각할 수 없는 영적 결혼으로서 바로크 시대에나 주교가 체험할 수 있었음직한 것이다. 

두 성인의 우정 관계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공동 작업 안에서 연결되어 구체화된다. 그것은 처녀들과 미망인들을 위한 「성모 방문회」의 창립을 위한 협동 작업이었다. 

그들 간의 영적 우정의 순화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쓴 책에서 하느님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프란치스코는 점점 매력을 더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요한나에게 그들의 정다운 영혼의 일치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큰 시련을 겪으며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하느님이 우리 사이에 맺어주신 우정이나 영적 결합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라는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받은 요한나는 그것을 십자가로 받아들였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들의 우정을 자신들의 개인적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상호의 인간적, 영적 성숙과 사도직 사명 수행을 위해 유익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정을 영원에 이르는 다리로 체험했으며 우정의 도움으로 그는 더욱 긴밀히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제5단계

성 프란치스코는 특출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우선 인간의 심성을 읽는 직관력과 영의 움직임에 대한 식별력, 지성 그리고 설득력 있는 말씀의 은사 등을 타고났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인내, 온유함의 자세를 키웠으며 끊임없이 공부했고 많은 것을 체험했다. 그는 신심(영성)의 다양성, 성성의 본질과 단계, 성화의 방법 등에 대한 지식과 교회의 정통한 가르침에 입각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에 가까이 접근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그는 영적 지도자에게 모범적 삶이 무엇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고 있었다. 

실로 프란치스코는 근대적 영적 지도자의 사부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온유하고 친절한 자세로 도왔으며 강론과 저서 그리고 편지들을 통해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 지도 봉사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0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4)


영적 가르침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탄생 400주년을 맞아 사도적 서한(1967.1.29)을 썼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성인이 이룬 은총의 결실들을 장엄하게 회상하며 기리고 있다. 

『예지에 밝고 통찰력을 가진 시각, 건실하고 명석한 이성, 날카로운 판단력,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한 친절과 호의, 말과 표현에 있어 부드럽고 친절한 우아함, 항상 활동하는 정신의 조용한 정열. 차분하고 조용한 평온. 힘과 분리되지 않은 온건, 정신의 높은 앙양과 다른 사람드에게 가장 좋은 재산, 하늘과 시를 주기를 희망하는 아름다움의 예찬, 다른 모든 덕행을 초월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모습을 묘사하는 특징들입니다』

그과 같이 인간적, 지성적, 영적으로 성숙해 풍요로움을 지녔던 성 프란치스코의 중요한 가르침 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애덕

프란치스코가 영성신학에 기여한 큰 공헌의 하나는 애덕의 유대 안에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와 성성을 통일시킨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완덕 혹은 진정한 신심의 본질이 특별한 수덕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였다. 그것을 이미 교의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의 다른 신학자들이 언급하엿지만 그 때까지 프란치스코 만큼 큰 열정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자 한 사목자나 신학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의하면, 애덕이 모든 덕들 중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다른 모든 덕에 능동적이고 현실적인 효력과 조화를 주기 때문이다. 실로 덕은 사랑의 질서인 것이다. 애덕을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절정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 한편 가장 중요한 것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사랑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2) 온유의 덕

프란치스코가 가르치고 실천한 덕들 중에서 애덕 다음으로 탁월한 것은 온유의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 마디로 남겨 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그것을 하루에 백 번이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에 의하면, 온유함이란 그리스도 정신의 구현이며 그 온유함에는 한계가 없다. 오랜 내적 투쟁을 통해 얻은 승화된 온유함은 그의성성의 한 표현이었다. 그는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니』(마태 5,5)라는 주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도록 구체적으로 생활한 증인이다. 

(3) 신심 혹은 경건한 생활

프란치스코는 참된 신심이란 어떤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많은 이들이 덕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잇으나 그것들은 전혀 덕이 아니다. 나는 탈혼, 황홀경, 무감각, 무감정, 신적 일치, 고양, 변형 등 영혼을 순수한 지성적 관상에로 들어올리고 근원적으로 정신을 응용하며 탁월한 생활을 하도록 해준다는 모종의 책에서 논하는 바 유사한 다른 완덕을 언급하려 한다. 이러한 것들은 덕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덕을 위해 또는 미래의 삶을 즐거움을 맛보이는 작은 표본으로 내리시는 보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은총을 받기를 열망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작품집 Ⅲ, 131). 그리고 참된 신심이 어떤 특수한 영성 훈련이나 수덕에 있는 것도 아님을 역설한다. 

『어떤 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덕으로 여기고 또 어떤 이들은 절식을, 어떤 이들은 자선을. 또 어떤 이들은 구송 기도나 묵상 기도를 덕행이라고 생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 기도에 덕을 두기도 하며, 무상으로 받은 특은들에 두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부속물을 주물로, 흔히는 그림자를 실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나로서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없는 다른 모든 완덕은 거짓 완덕이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완덕과 동일한 참된 신심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애덕에 관한 이중적 계명(마태 22,34~40)의 실천인 것이다. 

『참되고 살아있는 신심은 반드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일 뿐 결코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신적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한 그것은 은총이라 불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 신적 사랑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힘을 주는 한 그것은 애덕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뿐 아니라 조심스럽게, 빈번히 그리고 신속하게 행하게 한다면, 바로 그것은 신심이라 불린다』(작품집, Ⅲ, 14) 

(4) 신심의 다양성

프란치스코는 뒷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언급하게 될 「성성」을 「신심」으로, 영성의 다양성을 신심의 특성으로 표현한다. 

신심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비판받고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그는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니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신심생활 입문」에서 이렇게 신심(영성)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또한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각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 등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을 각각 달리 해야 한다』(신심생활 입문, Ⅰ,3).

그는 진정한 신심 수련이 모든 이에게 필요하고 모든 처지에서 가능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상태, 신분, 직업에 따라 다르게 배려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한 사람에게 적합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나 수덕하는 소수인들의 특권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 할 목표임을 강조했다. 『신샘생활이 군인들의 병사,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이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며 이단 교설이다. 관상적,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맞지 않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신심생활 입문, Ⅰ,3)

성화와 완덕이 수도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활 조건이든지 세상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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