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명언]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
변종찬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ἀρχὴ μὲν πίστις, τέλος δὲ ἀγάπη).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14,1에서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그의 영성을 잘 드러낸다.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교부이며,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테오포로스’라고도 불리는 이냐시오는 베드로가 세운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주교였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22; 36,2). 트라야누스 황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박해할 때(107-110년), 이냐시오는 로마로 압송되어 맹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의 핵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과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성인은 말한다(「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서간」, 6,1). 또한 숭고함에 이르게 하는 다른 모든 것이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다고 성인은 고백한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14,1).
사실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 삶의 일차적 표현이다. 이냐시오는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믿음과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가지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온전히 지닐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여 계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요, 성전을 모신 이, 그리스도를 모신 이, 거룩한 것을 모신 사람이며,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치장된 이들이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9,2). 또한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는” 이들이다(「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14).
그렇기에 이냐시오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15,3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심을 깨달으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성전이 되고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은 믿음과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과 믿음을 합한 것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분열과 분노가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8,1).
이냐시오는 이렇게 권고한다. “분열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닮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 되십시오”(「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7,2).
우리가 형제들과의 일치를 보존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룰 때, 바로 그때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사랑을 통하여 육신과 영을 지닌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사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 곧 탄생, 죽음, 부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냐시오 성인은 “이제 여러분은 온유함을 취하여 주님의 몸인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 사랑 안에서 자신들을 새롭게 하십시오.”라고 권고한다(「트랄레스인들에게 보낸 서간」, 8,1).
더욱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교회는 주교와 신부 그리고 부제로 구성된 교계제도를 가지고 있다. 성인에 따르면, “이들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교회라 부를 수 없다”(「트랄레스인들에게 보낸 서간」, 3,1). 믿음과 순명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대리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주교가 집전하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주교와 하나를 이룰 때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일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주교는 교회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징이며 판단 기준이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이 주교에게 순종하면 이는 여러분이 인간적인 것에 따라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음을 저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트랄레스인들에게 보낸 서간」, 2,1).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외적 고백과 전례 예식에서 벗어나면, 그리스도와의 초자연적 일치와 참된 내적 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라는 이냐시오 성인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보고 그리고 그분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곧 하느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생명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살 수 없으며, 이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이러한 신앙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야고 2,17).
변종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교황청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부학과 고 · 중세 교회사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교부학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