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
구본식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장 유명한 성인 가운데 한 분이며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영성, 선교, 자선, 사목 등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수도회를 창설한 분 가운데 한 분이다. 성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어 있어 그분의 생애와 명성에 대해서, 또 수도회의 활동에 관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영성과 이상이 그분의 제자 때에 와서는 현실에 적응하는 문제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창설자인 도미니코 성인이 사망할 즈음에 조직체제가 선 반면에, 프란치스코회는 그 창설자가 사망한 뒤에 규칙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로 한 창설자 밑에 처음에는 두 개, 나중에는 세 개의 다른 수도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테의 말대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상에 태어난 태양이었지, 조직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명상가였고 시인이었으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지, 신학자도 논쟁을 즐겨하는 설교가도 아니었으며 교회법학자는 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가 남긴 수도회는 가톨릭 교회를 일으키는 데 큰 맥락을 이루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가 필요한 상황에 항상 헌신적으로 대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변화
처음부터 수도자가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변신을 거듭하는 사람도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바로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은 돈이 아주 많은 옷감 장수였고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 태생의 귀족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천성은 온화하고 개방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였고 영특하였으며 음악적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부잣집 도령의 생활을 즐기는 삶을 살다가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첫 번째 사건은 1202년에 아시시와 이웃해 있는 도시 페루지아와 싸울 때 포로가 되는 사건이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혼란의 와중이었고 도시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빈번하던 시대였다. 민족문제도 아니고 나라의 통일문제도 아닌 도시 사람들간의 자존심 싸움에 프란치스코 성인도 가담하였고 이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것이다.
여기서 풀려난 뒤에 병을 심하게 앓게 되면서 그는 심중의 변화를 일으킨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면서 행복의 원천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방하여 사는 길이라고 느끼게 된다. 복음대로 철처히 사는 생활이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삶 중에서도 가난한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실천으로 허물어진 성당을 재건하는 일에 힘쓰면서 아시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와 화려한 삶을 완전히 버리고 거지차림으로 동냥하며 사는 완전히 가난한 생활로써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동냥을 하면서 나병환자를 돌보고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면서 1208년에서 1209년 사이에 그의 교회관에 변화가 생겨난다. 마태오복음 10장 9절에서 11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런 재물도 가지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주는 대로 먹으며 살라는 것이다. 여가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은 성당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복음의 설교를 통해 재건하는 것이며, 그 일은 가장 완전한 가난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주변에 ‘작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예수님처럼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파견하였다.
처음에는 프란치스코한테서 둘씩 파견된 사람들은 당시의 평신도 이단자들의 모습과 설교내용이 크게 다른 바가 없어서 도시나 지방의 성직자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당시 아시시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중부지방에는 가난을 강조하고 교계제도를 무시하는 이단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차별되는 일이 중요하였다.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1208년 로마를 순례할 때 아시시 주교와 꼴로냐 추기경의 도움으로 인노첸스 3세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수도원 규칙을 인가받았다.
하지만 이 수도회 규칙은 성서의 말씀을 인용한 아주 간단한 것으로 곧 다른 규칙으로 바뀌었다.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작은 형제들을 교회 관할권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부제로 서품하였다. 겸손과 가난과 걸식을 원칙으로 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최고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서 현명하고 지혜롭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 밑에서 종처럼 봉사하는 봉사정신을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삽시간에 굉장히 불어났다. 이때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즉 이방인에 대한 선교사업이었다. 이름하여 ‘사랑의 십자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실천을 통한 이교인들의 개종운동이었다. 1212년에 성인 스스로 선교에 나섰고, 1219년에는 다섯 번째 십자군에 가담하여 실패는 하였지만 알키밀이라는 술탄을 만나 직접 복음설교를 하였고,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방문을 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지금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개종을 포기하지 않고 온갖 박해 속에서도 교계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회가 이스라엘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많은 치명자를 낸 덕분에 가톨릭 교회가 이곳 성지를 관리하게 되었고 우리들은 그곳을 쉽게 순례할 수 있는 것이다.
형제들이 아주 많아진 상황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해지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예측을 구체화하는 능력은 없었던 듯하다. 1221년에 24개항에 이르는 규칙을 만들었지만 불안전하여 1223년에 교회법적인 인가를 받은 규칙이 새로 완성이 되었고, 호노리오 3세 교황이 1223년 11월 29일에 정식으로 인가하였다. 12개항으로 만들어진 이 규칙은 성인한테 유일한 가르침인 복음정신에 입각한 가난과 겸손과 노동과 설교와 이방인에 대한 복음전파 등이 들어있으며 활동과 관상의 형평성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공동체의 가난에 대해서도 강조를 하고 있다.
공동체의 운명은 첫제자들한테 일임을 하였다. 첫책임자는 베드로 가타니였는데, 그는 수도회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추기경을 교황한테 청하였다. 교황은 뒷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되는 오스티아의 우고리노 추기경을 후원자로 임명하였다. 이 후원자 추기경 제도는 아주 큰 공동체를 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제도였다. 이단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고 교황청과 지방 주교들과 일어나는 마찰을 중재하는 일들을 하도록 초대받았다. 이 추기경 후원자로 인해 창설자인 프란치스코 성인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또 다른 변화를 하게 된다. 즉 성인이 동방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뒤에 그의 대리자들이 볼로냐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동체를 마련하였다. 당시 볼로냐는 대학이 가장 먼저 설 정도로 학문연구가 활발하던 곳이다. 성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볼로냐의 학문연구의 집을 폐쇄했을 때 후원자 추기경이 다시 볼로냐 공동체를 열도록 권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란치스코 성인 자신이 부제였고 평신도 사도직으로 시작한 영성이 사제중심의 공동체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이단과 투쟁하기 위한 설교를 위해서는 학문연구가 절대적이었고, 이후 프란치스코회는 도미니코회와 더불어 중세 학문연구의 중심 수도회가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이후의 수도회의 발전
1224년 봄부터 성인은 베르나 산 위에서 몇 명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기도생활을 하면서 온갖 병마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오상을 받기까지 성인은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 고통 중에서 프란치스코는 1226년 8월에 유언장을 남겼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다시 한번 그의 제자들한테 완전한 가난의 생활을 살도록 요구하고 규칙에 더욱 충실할 것과 로마 교회에 오롯이 순명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1226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228년 6월 29일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인이 사망한 뒤에 유언장을 놓고 과연 유언장이 규칙과 같은 권위를 갖는 문서인가 하는 문제로 형제들간에 논쟁이 일어났다. 가난한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인의 유언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기생활과 같은 완전한 가난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다른 중간적인 처지에서는 이미 공동체가 형성이 되어 학문연구의 필요성이 큰 만큼 규칙을 완전히 따르기란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칙서 “Quo elongati”를 1230년에 반포하여 유언장은 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사절을 보내어 형제들이 가난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업무를 보살피도록 하였다.
가난에 대한 논쟁은 성인의 마지막 축복을 받고 총장이 된 코르도나의 엘리야(1232~1239년)로부터 일어났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고 세상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당시의 다른 수도회의 모범을 따라서 수도회의 가난에 대한 규칙을 완화하여 교황청의 특권을 수용하고 아시시에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건축하고 학문연구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성인의 유언장과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때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난에 대한 논쟁으로 1239년에 엘리야는 해임되어 쫓겨났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수도회의 운명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양쪽의 극단적인 주장을 완화시키는 큰 인물들이 나타나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 시작하였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과 1254년부터 1274년까지 총장이 된 대학자 성 보나벤투라의 공적이 컸다. 이들은 중간 태도를 견지하며 가능한 한 이상적인 초기의 규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변화한 상황에 적합하고 적절한 필요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가난에 대한 규칙이 엄격히 지켜지지 않은 데는 수도회가 성직자 중심으로 바뀐 탓도 있다. 성직자들은 사목을 할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생활을 하면서 동냥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성직자가 아닌 단순한 수사들은 점점 공동체의 장상이 되는 기회가 없어져 수도회 안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논쟁은 초기보다는 14세기에 이르러 더욱 큰 논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중에서는 아주 극단적인 단체까지 형성이 되어서 세기를 거듭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후 수도회의 정착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겠다.
구본식/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교수 ‧ 신부
[경향잡지, 199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