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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30 12:00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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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128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1) 생애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리지외의 데레사 마르땡은 15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그 울타리에서 나온 적 없었지만 「선교지와 선교사들의 수호자」로 선언되었고, 체계적 신학 논문 한 편도 쓴 적 없엇지만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또한 데레사는 범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고한 영성이나 엄격한 수덕을 주장하지 아니했고 여느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그러나지 않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24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성 비오 10세가 담화 중 일컬음)이라 일컬어졌으며 시복, 시성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위대하게 했을까? 그 비결은 「일상적 일을 비상한 사랑으로」수행한 그녀의 「작은 길」에 있었다.
 
데레사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1873년 1월 2일 아버지 루이 마르땡과 어머니 아젤리 게렝 사이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지 이틀만에 튼언니 마리아가 대모를 서며 세례성사를 받았다.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 데레사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유모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랑송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말레 마을에서 데레사는 유모 로즈 댈레에 의해 14개월 정도 양육된 후 집으로 돌아왔다. 22개월 된 아기 데레사는 예수님께 소리내어 기도를 하여 가족을 기쁘게 했고 네살 되었을 때엔 여덟 살 된 언니 세레나에게 하느님의 전능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데레사는 가족의 따뜻한 애정에 감싸여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풍부한 감수성을 지녓으며 나이에 비해 영리했고 놀라운 통찰력을 갖추었다. 

이 어린 데레사에게 큰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다섯 살도 되기 전인 1877년 8월 28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후 어린 데레사는 가족들과 함께 외삼촌이 살고있는 리지외의 뷔소네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어머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 온 데레사는 온통 달라진 새로운 세계에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1881년 10월 3일 여덟 살의 데레사는 리지외의 베네딕도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적도 뛰어났으나 생활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데레사는 네 살에서 열네 살까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1882년 10월 2일 둘째 엄마로 선택하고 의지해오던 폴리나 언니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데레사는 그 당시 마음의 상태를 뒷날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칼에 찔려 꿰뚫리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저는 둘째 엄마를 잃는다는 것만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슬프게 많이 울었습니다』

데레사는 한 학년 월반해서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3학년에 들어가 우등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교구의 규칙에 정해져 있던 연령에서 이틀이 모자라 첫영성체 자격에 미달되었다. 외숙부와 함께 교구장 주교에게 특별 허락을 청하러 갔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데레사는 두 엄마를 잃은 슬픔과 첫 영성체가 보류되는 아픔 등 정신적 충격으로 신경 계통의 병에 걸리게 되었다. 다음해 5월 8일 그녀는 그토록 고대해 오던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날의 추억을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1883년 5월 13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기도하던 중에 성모님상에서 온유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면서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되었다. 

1886년 10월 7일에 레오니아 언니가 글라라 관상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며칠 후인 10월 15일 셋째 엄마 역할을 했던 마리아 언니가 가르멜에 입회했다. 아버지 곁에는 셀리나 언니와 자신만 남게되면서 데레사에게 집안 분위기는 삭막한 지경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인간적 실망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발전시켰다. 『언니의 결심을 알게되자 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가지지 않겠노라고 작정했습니다』.『제 마음을 언니에게 말할 수 없게 되어 저는 하늘 쪽으로 몸을 돌이켰습니다』.

데레사는 인간적인 낙심, 슬픔을 은총 안에서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갔지만 아직 세심증과 극도의 민감성으로 자기 폐쇄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886년 성탄 밤에 그녀는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받으며 치유의 은총을 체험했다. 9년 후에 데레사는 그때 자신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이 이루신 기적이었다고 확신했다. 『10년 동안 제 노력으로 안 되던 것을 예수님이 한 순간에 이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9년간 고통을 겪으며 잃었던 힘을 마침내 되찾게 되었고 그후로는 그 힘을 다시 잃지 않았다. 

데레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 올랐고 그 열망은 결국 가르멜 수녀원 입회를 결심하게 하였다. 열 네살 된 데레사의 입회 지원은 연령 미달의 이유로 가르멜 지도신부로부터 허락되지 않았고 교구장 위그랭 주교를 방문하여 관면을 요청했으나 역시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교황께 호소하기로 마음먹고 로마에 가 1887년 11월 20일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였다. 교황께 소원을 간곡히 말씀드렸으나 쇄도하는 다른 알현자들의 순서에 밀려 그녀가 원하는 답을 받지 못했다. 결국 데레사는 이듬해 4월 9일 15세의 나이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9개월간 지원자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기쁘게 살면서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성격, 자라고 교육받은 상황 및 일상생활 습관의 차이로 인해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889년 1월 10일 그녀는 「예수 아기와 성면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선택하고 착의식을 햇다. 그리고 다음해 9월 24일에 서원을 했다. 그녀의 서원 예정인은 1월 11일이었으나 장상들에 의해 연기되면서 8개월 간의 시련을 겪은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데레사는 1893년 2월 20일 수련장 보조자로 발령 받았다. 둘째 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데레사로 하여금 수련장을 보조하도록 했던 것이다. 데레사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직접 배운 「작은 길」로 수련자들을 인도하고자 했다. 

1894년 7월 29일 데레사의 아버지 루이 마르땡이 세상을 떠났다. 그 해 9월 14일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던 언니 세레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언니가 입회하면서 다섯 자매 모두 수도자들이 된 것이다. 세레나는 동생 데레사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10월말 데레사는 언니인 아녜스 원장 수녀의 명으로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고 더욱 강렬히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절감하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싶어했다. 

그리고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에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했다. 

데레사는 1896년 4월 3일 성 금요일 새벽 첫 각혈을 했고 그 후 건강이 점점 안 좋아졌으며 이듬해 4월 6일 원장 수녀는 데레사의 마지막 말을 적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8일 데레사는 자신의 방에서 병실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거기서 스녀는 자신의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을 마치고 투병 중에 「작은 길」을 모든 영혼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느꼈다. 1897년 8월 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9월 30일 저녁 7시20분 데레사는 탈혼 중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며 미소를 지은 채 숨을 거두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데레사는 1923년 4월 29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17일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4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2) 영성


데레사의 영성의 핵심은 영적 어린이의 「작은 길」에 있다. 그 길을 발견한 성녀는 일생동안 그 길을 걷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알려 주고자 했으며 풍성한 결실을 이루었다. 그녀에게 이 작은 길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인 성성(완덕")이며 그 성성에 나아가는 방법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기본적 자세는 겸손, 단순성 그리고 신뢰심이다. 

작은 길의 발견

데레사는 어느 날 구약 성서 원문 일부를 기록한 노트를 언니 셀리나 수녀한테 빌려 읽다가 그녀의 「작은 길」을 발견하게 되는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그 실마리는 잠언 9장 4절이었다. 『누가 만일 아주 작은 자이거든 나에게로 오라』(공동 번역 성서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어려서부터 언제나 성녀가 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잇었으나 초라한 자신의 무력감을 체험하면서 갈등을 겪어오던 데레사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작은」이란 표현이 크게 와서 닿았고 온통 그녀를 설레게 했다. 여기서 데레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불림 받은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께 가야하고 그분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다고 느꼈다. 

그 후 데레사의 눈의 뜨인 이사야의 다음 말씀은 그녀에게 새로운 빛을 가져다주면서 성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66, 12~13).

그녀는 「예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표현했다. 『저를 하늘에까지 들어 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데레사가 깨달은 주요한 진리는 성화에 있어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영적 어린이의 작은 길이 나타난다. 작은 채로 남아있으면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아무 걱정도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맟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성의 다양성과 작은 길

데레사는 로마서 9장 15~16절 말씀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제기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부 특정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어찌하여 사도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노 같은 분들은 극적인 내적 변화를 이루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 위대한 영혼으로 밝게 빛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특별한 은총의 체험이 주어지지 않아 작은 영혼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일까?』

데레사는 이에 대해 오랜 묵상과 숙고 끝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만일 작은 꽃들이 모두가 자미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연은 그 봄 단장을 잃어버릴 것이고 들판은 다시는 작은 꽃들로 단장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정원인 영혼의 세계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백합화나 장미꽃에 견줄 수 있는 큰 성인들을 창조하셨고 한편 작은 성인들도 창조하셨습니다』

데레사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향기 좋은 장미나 순결한 백합과 경쟁될 수 없는 들판의 이름모를 꽃들 속에 있다는 느낌이 둘어도 마음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이 그렇게 마련하셨으며 그분은 어떠한 모습이든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각자의 영혼에 그 나름대로 성성을 주시므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각 영혼들 사이의 차이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길의 기본 자세

데레사의 작은 길의 기초는 무엇보다 「어린이 정신」으로 표현되는 겸손이다. 그녀는 아무런 꾸밈이나 자만심,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소망도 없었으며 자신이 어떤 가치있는 존재로 보이려는 사심도 없었다. 데레사는 겸손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제게 두신 최대의 은혜는 제가 작은 자이며 모든 선에 대해 무력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고 마땅히 제 안에 그분께서 머무르시도록 언제나 아주 작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어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의 길은 단순성과 긴밀히 연관된다.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며 단순하게 행동하듯이 데레사도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단순성은 조금도 기교를 부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즉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의 모습니다. 

데레사의 삶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충만해 있었다.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심을 믿었을 뿐 아니라 체험으로 깊이 깨달았다. 그녀에게 성성이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함으로써 얻는 은총이다. 그녀에게 신뢰심은 자신의 약함을 절실히 느낄수록 오히려 더 굳어졌다. 자신의 허물이나 불충실을 볼때 그것이 신뢰의 동기가 되었으며 가장 당황하게 하는 신앙의 시련, 마음의 메마름, 권태, 유혹 등 모두가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작은 길의 핵심은 ‘사랑’

데레사는 자신의 허원식 날을 기해 특별 기도문을 지어 품에 간직했었다. 그 일부 내용은 이러하다.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모든 것이 되어 주소서. 세상의 물건들이 제 마음을 조금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아무 것도 제 평화를 어지럽지 못하게 해 주소서. 제가 아니고 오직 저의 예수님, 당신인 사랑만을 구하나이다. 예수님, 저로 하여금 당신을 위한 순교자로, 마음이나 육신의 고통, 그보다도 차라리 두 가지 순교를 합쳐 당하여 죽게 하소서』

가르멜 수도원 안에서 데레사는 생활 전체를 사랑으로 단순화시켰다. 사랑은 그녀의 생애의 목적이었으며 모든 행위의 동기였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완덕 혹은 성성의 절정이었다. 그녀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저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사촌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완덕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고요? 저는 한 가지 방법밖에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뿐이지요』. 데레사는 하느님안에서 이웃을 사랑했고 또한 이웃을 통해 하느님께 사랑을 드렸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서 이웃에 대한 애덕의 의무는 전모를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일치하면 할수록 자매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작은 길의 핵심과 방법은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행한 지극히 미소하고 가장 감추어진 행동은 종종 위대한 업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데레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망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원의와 함께 삶에서 오는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 견대며 희생과 극기를 기꺼이 할 수 있게 하였다. 데레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사랑 담긴 조그마한 희생의 꽃다발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녀는 희생의 기회를 일상의 사소한 일 안에서 순간마다 찾았다. 『저는 아무리 작은 희생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극기는 어떤 활동에 대한 충동의 억제, 감상적 열심이라든지 지나치게 강한 소망, 호기심에 사로잡힌 욕구, 반감, 자만심 등 자기중심성에허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데레사는 계속적인 자아포기적 극기와 작은 희생 중에 언제나 미소를 띠고 기쁘고 명랑하게 생활하였다. 자신을 찾지 않을 때부터 제가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1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3) 사도적 영성


『나는 지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나의 천국을 지내고 싶습니다』

이것은 데레사의 마지막 말씀 중의 한 부분으로서 그녀의 비문에 새겨진 문구이다. 

데레사는 일생동안 기도와 희생을 통해 자신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도직에 기여했다. 한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세상의 구원에 유익한 존재가 될 것임을 예견하며 확신하였다. 데레사의 소망은 영혼 구원 협력을 위해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을 하느님 곁에서 영원토록 지속코자 한것이었다. 

관상 수도자로서의 사도직 수행 비결 - 사랑

데레사는 사제, 사도, 순교자처럼 활동적 사도직을 수행하고 싶은 소망을 강렬히 느꼈다. 그녀의 사도적 소명은 관상 수도 생활 속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영웅적으로 모든 일을 하고싶은 열의가 그녀를 온통 사로잡았던 것이다. 데레사는 바오로 서간(1고린 12장)을 통해 교회안에서 각기 다른 성소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자신의 그러한 원의를 들어주실 것으로 확신했다. 

어느날 데레사는 고린토 1서 13장을 읽어나가다가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은총도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데레사는 이렇게 추론하며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장이 몸의 다양한 각 부분에 피를 공급하는 것 같이 사랑만이 교회의 서로 다른 지체들을 움직이게 한다. 실로 사랑은 시공 속에 있는 온갖 소망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데레사 자신이 교회의 심장 안에 머물면서 유일한 소임, 즉 사랑하는 것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신의 소망대로 모든 소명에 응답하고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경우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사랑의 모든 때와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마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인 교회의 심장 안에서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후 데레사는 이미 알고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다음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가장 작은 행위가 다른 업적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교회에 유익하다』(영혼의 노래 29,2 ). 

사제 성화 위한 기도 · 희생 봉헌

데레사는 사제들의 성화와 그들을 통한 죄인들이 회개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싶은 열망이 그녀의 성소와 생활의 원동력이었음을 표현했다. 실로 데레사는 자신의 생애가 주님의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봉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영혼들을 구하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목적으로 가르멜에 왔습니다』『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도매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거룩하게 됨으로써 손발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요』

데레사는 사제들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받은 사제직 때문이었다. 그러한 마음 그녀의 편지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피우는 신부님을 제가 도울 수 있도록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제 마음에 타오르게 예수님께 청해 주세요』(1896.6.23. 외방 선교회 아돌프 르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저는 신학생님이 좋은 선교사가 되실 뿐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성인이 되시도록 예수님께 기도 드립니다』(1896.10.21. 벨리에르 신학생에게 보낸 편지. 『우리 영혼은 그분 안에 하나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897.2.24. 벨리에르 신학생에게 보낸 편지). 

죄인들 회개 위한 봉헌

데레사는 또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의 기도와 희생의 삶을 봉헌하고자 하였다. 

데레사의 생애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데레사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와 죄인들 사이에 아무런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실로 데레사는 의당 죄인들에게 내려져야 할 징벌을 대신 받으려고 하느님의 정의 앞에 희생물로 자신들을 바치겠다는 식의 일반적 자세에 공감하지 않았다. 

죄인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그녀의 언니들이나 사제들을 위해 드리던 기도와 매우 유사했다. 데레사는 신비체 안에서 죄인들과 오직 하나를 이룰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시을 위해 소원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그분의 사랑의 물결을 그들 위에 넘치게 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1887년 살인자 프랑지니의 사건은 영혼의 구원에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던 데레사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중한 죄를 범한 그 사람의 사건을 알고서 그의 영혼의 구원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연일 신문은 그를 경멸적 표현으로 비판했고 단죄했다. 데레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선행을 바쳤으며 그를 위한 지향으로 여러차례 미사를 봉헌했고 언니와 함께 탄원기도를 바쳤다. 『주님, 당신이 불행한 프랑지니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으오니 만일 그가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또 아무런 통회이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심치 않을 만큼 저는 예수님의 무한한 인자를 믿나이다. 그러나 저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가 통회했다는 표 하나만 보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사형 집행일에 단두대에 끌려가며 여러 차례 회개 권면을 거부했던 프랑지니가 마지막 순간에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청하여 세 차례나 입을 맞추고 지상의 삶의 막을 내렸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데레사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심에 감사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을 주님이 주신 표지라고 해석했다. 

그후 데레사는 일생동안 죄인들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와 희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무한한 공로에 합하여 그들을 위해 봉헌했다. 데레사는 어느 날 언니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셀리나 언니, 영혼들을 잊지 맙시다. 그 대신 그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잊읍시다』

데레사는 임종을 앞두고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 또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표지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나라에서 지속될 구원 사도직 확신

데레사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사제들 곁에서 특별한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을 소망했고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녀는 천국에서 더 많은 영혼구원에 협력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제게 지상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마음을 주셨으니 반드시 이를 실현해 주실 것입니다』『천국에 들어간 후에 저는 바빠질 것입니다. 그때 제 천직이 시작될 테니까요』『하느님께서 제 소망을 들어주신다면 저의 천국은 세상 마칠 때까지 지상의 사람들을 돕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8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4)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데레사는 뒷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정립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 성성의 본질, 유일성 및 다양성 그리고 성화에 있어 하느님의 주도권 등에 관한 정통한 교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성성에의 부르심이 일부인에게 해당되는 특전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관련되는 것임을 천명했으며, 성성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그리스도인 각자가 받는 고유한 선물과 직무를 따라 산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친다(교회 헌장 39, 40, 41항 참조).

이러한 차이는 교회를 더욱 활기 띠고 더욱 아름답게 그리고 풍요롭게 한다. 데레사는 성서말씀 묵상을 통해 「작은 길」을 발견하는 여정에서 그러한 성성에 관한 진리를 이미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또한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반의 요지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사랑이 성성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가장 유효한 척도임을 선언한다(교회 헌장 42항 참조). 데레사는 실로 사랑이 성성 및 완덕의 진수이며 방법임을 분명히 깨달았고 삶으로 증거했다. 

2) 데레사는 교회의 선교 사명수행에 활동적 측면뿐 아니라 기도의 지원이 필수적인 것임을 재확인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그분의 사명 수행을 위해 활동과 기도를 조화있게 통합시키셨다. 그분은 활동하시기 전 후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셨고 그 뜻에 일치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활동하셨다. 교회의 선교의 비결은 바로 그분의 모범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분리될 수 없는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이 복음선포 활동이고 다른 한 측면이 기도와 희생의 지원이다. 실로 선교는 활동적 측면으로서 사목 현자이나 선교지에서 직접 봉사하는 복음 선포, 교리 강좌, 사회사업, 애덕 실천 등 뿐 아니라, 활동 봉사자 및 보조자들의 기도와 희생을 요구한다. 이러한 기도와 희생은 선교의 결실을 위해 간과할 수 없는 적극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데레사는 선교의 둘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늘 선교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강력한 기도의 지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3) 데레사는 성인의 길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에 의해 쇄신 정립된 가르멜 수도회의 영성이 제시하는 성성은 범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 정상과 같아 요원하게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에 비해 리지외의 데레사는 드높은 영성이란 극히 단순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삶을 통해 보여 주었다. 「작은길」을 통해 신비주의의 일상성을 실증해 준 것이다. 

예를 들면 데레사는 묵상 시간에 곁에서 작은 소리를 내는 자매 때문에 무척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천상 음악으로 여겨들어 기쁘게 참았고 공동 빨래터에서 부주의한 자매가 튀기는 더러운 물로 얼굴을 흠뻑 적시면서도 그것을 보배로운 비처럼 바꾸어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작은 일상 사건을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큰 신비의 현실로 바꾸어 갈 정도로 불태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온 것이었다. 데레사의 생애는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에 견주어지곤 한다. 비단이 곱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을 짠 명주실이 가늘고 섬세한 데 있는 것처럼 그녀의 생애는 일상에서 조그마한 일 하나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정성과 사랑 그리고 기쁨으로 실행함으로써 빛나는 성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녀는 평범 속에 비범이 있고 하찮음 속에 위대함이 존재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실증하였다. 

4) 데레사의 생애는 짧고 감추어진 것이었지만 사후에 자서전을 통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데레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98년 9월 30일 언니인 아녜스 수녀는 데레사의 자서전을 출판해 프랑스의 전 가르멜 수도원과 교회의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곧 많은 주교들과 각지 수도원에서 리지외 수도원으로 감탄의 편지들이 날아왔다. 

1899년 5월에 그 책이 재판되었고 다음 해에 6천 여권이 판매되었다. 곧 이어 영어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15년에는 데레사의 자서전 21만1515부와 생략된 전기 71만부 이상이 그리고 「장미꽃의 비」1만부 가량이 읽혔다. 한국에서는 1954년에 「가르멜의 소화」(언니인 아녜스 원장 수녀에 의해서 다소 수정된 것)가 번역되어 몇 년 사이에 절판되었고, 1960년에 성녀가 직접 쓴 자서전을 번역 초판을 낸 후 2000년 5월까지 22판이 인쇄되었다. 자서전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보급되고 많이 읽히면서 회개하는 이들과 병에서 치유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때론 기적과 함께 데레사의 발현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5) 데레사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7년 10월 19일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까지 서언된 「교회박사」는 모두 33명이다. 그들 중 여성은 3명인데 1970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선포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1997년 마지막으로 선포된 리지외의 데레사가 그들인 것이다. 

리지외의 데레사의 전기와 글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록들에 대한 연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세계적으로 점점 확산되어 갔다. 1898년에서 1947년까지만 해도 데레사에 관해 발행된 책은 무려 865종이나 되었다. 시복식 준비 과정에서부터 많은 신학자들은 데레사가 쓴 글들을 연구했다. 그들 중 콤브 신부는 이렇게 표현했다. 『참으로 성녀 데레사는 현대에 성령에 의한 가장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분이다. 성녀는 고요하고 감추어진 혁명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데레사를 시복, 시성한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를 20세기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겼으며 그 성녀를 자신의 「교황재위 기간의 별」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현재의 신학자 이브 꽁가르는 성녀 데레사를 「20세기초에 하느님 손에서 원자력으로 점화된 하나의 등대」라고 표현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우들은 데레사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예언적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말씀, 성서를 중시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향주삼덕을 우선적으로 중히 여기는 것,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 복음 선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 타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에 대한 형제적 이해와 배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역동적 사고방식,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학 등이다. 

6) 데레사는 모든 이의 사랑스런 자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녀의 사상은 언제나 모든 이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데레사의 사상은 많은 철학자들과 문학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아픈 이들을 향한 힘찬 희망의 호소가 되었다. 그렇게 작은 이들도 복음적 성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정서적 불안, 신경증, 폐결핵 등 많은 병을 앓으면서도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배려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데레사는 그녀의 생애를 통해 증명해 준 것이다. 

데레사는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은총으로 받은 대담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포를 몰아내 준다. 일상생활 그 자체가 바로 누구나 다 걸을 수 있는 성성에로의 확실한 길이 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데레사가 심한 고통을 겪으며 세상을 떠난 병실에서 기도한 후 여러 관상 수도자들에게 말했다. 『성녀 데레사는 인생의 의의를 찾고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느님 안에 숨겨진 생활의 깊이와 빛남이 소중하다는 과제를 던져주고 계십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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