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St.VINCENT de Paul
San Vincenzo de’ Paoli Sacerdote
1581 near Ranquine, Gascony near Dax, southwest France
- 1660 at Paris, France(body incorrupt)
Vincenzo = vittorioso, dal latino
자선단체의 수호성인. 창설자
성 빈첸시오는 1581년 남서 프랑스의 랑퀴엔 출신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툴루즈에서 신학을 배우고 1600년에 서품 되었습니다. 1605년에 이슬람의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였으나 1607년 아비뇽으로 탈출하였고, 1608년 파리에서 드 베뢸 신부의 영향으로 일생을 자선활동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고,노예선 선장 곤디 백작의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죄수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녀 자선 단체들을 창설하였고 1625년에는 보통 라자리스트회라고 불리는,특히 시골 선교와 성직자들의 훈련을 위한 선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8년(1633.11.29)후 온전히 병자와 빈자의 간호를 담당하는 첫 여자 수도회인 자선 수녀회를 성녀 루이즈 드 마빌락과 함께 창설함으로써 성 프란치스코 드 살레시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던 계획을 완수하였습니다.
프롱드 전쟁 때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장기적 안목의 계획을 세웠고 또 얀세니즘을 단죄하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으며, 1833년에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가 자유사상가들로 부터 가톨릭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프레드릭 오자남 등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1885년,레오 13세에 의해 자선 사업 단체와 병원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빈첸시오는 죽어 가는 어떤 하인의 고백으로 프랑스 농민의 절실한 영적 요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가스코의 조그마한 농가 출신인 그의 생애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조그마한 야망을 가지고 사제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도와 준 하인의 주인인 공대 백작 부인은 시종들과 소작인
그리고 평범한 시골 사람들 처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려 하는 유능하고 열성적인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단체를 후원해 주도록 남편을 설득하였다.
빈첸시오는 매우 겸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파리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갤리선 노예들 가운데서 일한 후에,그는 오늘날 라자로회 혹은 빈첸시오회로 알려진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정결,청빈,순명과 성실의 규율을 지키기로 맹세한 이 사제들은, 조그마한 마을과 촌락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쳤다. 빈첸시오는 후에 각 본당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자선 단체를 만들었다.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야크의 도움으로 성 빈첸시오의 애덕 자매회가
설립 되었는데,’그들의 수도원은 병실이고, 그들의 성당은 본당이며,그들의 봉쇄 구역은 도시의 시가지이다.’
그는 선교 사업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파리의 부유한 부인들을 모아서
여러 개의 병원을 세웠다. 또한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구호금을 모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1천 2백 명이 넘는 갤리선 노예들을 위해 그들의 몸값을 치렀다.
그는 당시 나태와 악습과 무지로 가득 찬 사제들을 위해 매우 열심히 피정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 양성의 개척자였으며 신학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빈첸시오는 아주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조차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만일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는 ’딱딱하고 쌀쌀하며 거칠고 까다로운’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온화하고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으며, 다른 이의 요구에 매우 민감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자선 단체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이들 단체 중에 특별한 것은 물론 1833년에 그의 찬미자 프레데릭 오자남에 의해 만들어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이다.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 농부와 학자, 지성인과 소박한이등 하느님의 자녀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큰 관심은 가장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 질병,가난,무지,또는 학대로 무기력하게 된 사람들- 에 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빈첸시오 아 바울로는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은 굶주림으로 죽음에 이르고 있고, 부자들의 부유한 생활은 더욱더 호화로워지는 반면에 육체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적합한 수호 성인이다.
"당신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것 가운데서도 만족하게 살고자 애쓰시오."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하느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결정을 서둘러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충실히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으시오. 내가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마음이 바라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빈첸시오의 편지에서)
오, 구세주여,
당신은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방법으로도 이 계명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모든 의미인 그런 신분으로,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끊임없는 요구들을 내포하는
그런 소명으로 저를 불러 주셨으니 영원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저에게 은총을 주시어 우리 공동체가 이웃을 섬기기를 일삼는 데에,
우리 누구나가 역경에 처한 이웃의 외침을 들으면
곧장 하던일을 팽개치고 나서는 데에 더불어 이바지하게 하소서.
*성 빈센트의 기도*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라자로 남자 수도원과 카리타스(愛德) 자매회라는 여자 수도원의 창립자로서, 온 교회의 자선 사업의 총 보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빈첸시오라는 말은 프랑스말로 승리자라는 뜻인데,
성 빈첸시오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온 세상을 사랑으로서 정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를 돕기를 무엇보다도 즐겼으며,
자기 천성을 그래도 잘 보전하고 지켜서 커서도 자선과 박애 사업에 투신해 이를 천직으로 알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빈첸시오는 교회에 있어서는 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우대를 받고,
일반사회에 있어서는 그의 자선사업의 공로로 말미암아 온 인류 사회의 은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576년 4월 26일 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의 6남매 중 셋재 아들로 프랑스의 가스코뉴 주의 란기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가난한 살림인데다가 형제가 여럿이었으므로 빈첸시오도 어려서부터 목동으로서 가사를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세가 되었을 때 그의 탁월한 재주를 아깝게 생각해 오던 아버지는 그를 근방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맡겨 교육을 받게 했다.
빈첸시오는 거기서 4년간이나 학문과 고행에 열중한 후
수도원장의 알선으로 어느 변호사의 가정에 유숙하면서
닥스 대학교와 툴루즈 대학교에서 수업한 후,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순조롭게 사제가 되었으나 학문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부인의 유산을 넘겨받게 되어
마르세이유에 가서 이를 접수한 후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뜻밖에 투르크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가련하게도 소지품을 모두 약탈당하고,
게다가 몸은 철사로 결박되어 아프리카에 끌려가서 튜니스란 곳에서
노예로 팔리는 불운을 겪었다.
빈첸시오는 제일 먼저 어느 선주(漁業家)에게 팔렸고
그 후로는 의사의 집에서 일한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어느 대 농가의 주인에게 인도되어 혹독한 더위에 땀을 흘려가며
온종일 밭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 때도 있었다.
그 주인은 전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던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에도
어느새 믿음을 잃고 자기 구령 사업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 불행한 배교자였다.
그런데 그 주인의 아내는 빈첸시오가 노예 같지도 않게
몸을 아끼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찬미가를 읊으며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고 무척 감탄했다.
하루는 종일 그의 종교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점점 더 탄복하며 자기 남편을 향해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훌륭한 종교인데, 당신은 어째서 이를 버렸습니까?"하고 물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아내의 말과 더불어 주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제 잘못을 깨닫고 아내와 빈첸시오를 데리고 튜니스를 거쳐 프랑스에 가서 그곳에서 자신은 회개하고 아내는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아내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남은 두 사람은 다시 로마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주인은 로마에서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고, 빈첸시오는 순교지를 찾아가서는 기도하며, 한편으로는 신학 연구를 하고 나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 근방에 있는 성 젤마노의 작은 집에서 매일 부근의 자선병원에 통근하며 환자를 간호해 주고 교리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의 집에 도둑이 들어와 변호사의 금품을 훔쳐간 일이 있었는데,그 도난의 혐의를 빈첸시오가 받게 되어 그는 매우 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는 자기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했으나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런 훔치는 것을 하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하고 간단한 말로 변명할 뿐이었다.
그의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는 훌륭히 보답되었다.
그것은 범인이 제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자수하게 되자 저절로 그의 무죄함이 백일하에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남몰래 수많은 선행을 실천했는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한 친구가 신앙에 대한 유혹으로 밤 낮으로 고민하던 끝에 이를 빈첸시오에게 다 토로했다. 그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시련이었다.
억제 할 수 없는 동정심에 가득 찬 그는 친구를 대신해 그 시련을 받으려고 결심하고 하느님께 그 뜻을 전구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부터 친구의 마음에는 치열했던 모든 유혹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잔잔한 바다와 같은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빈첸시오의 가슴에는 의혹의 구름이 끊임없이 몰려와 그 후 4년동안 평화가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도신경을 기록한 종이 조각을 가슴에 매달고 그것을 매일 보면서 신앙의 은혜를 청했다. 그리고는 여러 날 기도한 후 일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헌하리라는 마음가짐을 먹었다. 그가 마음먹은 대로 일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헌한다는 서원을 하자유혹의 검은 구름이 깨끗이 사라지고 화려한 신앙의 광채를 받을 수 있었다.
1612년, 빈첸시오는 37세로서 클리시이라는 시골 성당의 책임자로서 5년간 맡은 임무를 완수한 후, 전근되어 샤튼의 주임 신부가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프랑스의 해군 장관으로서 유명했던
곤디 가문의 전속사제로 선택되고,
또한 소작인, 뱃사공, 배일꾼들과도 접촉할 기회를 얻어 그들의 노고와 종교적 지식에 대한 갈망이 대단함을 알고 마음속 깊이 느끼는 바가 컸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언제나 그런 노동자들의 구령을 도와 주려는 의도하에 묵상회를 열어 대환영을 받고 바라던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곳곳에 있는 하류 사회의 사람들을 위해 그와 같은 모임을 가지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일꾼이 없어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마침내 생각한 끝에 그는 사랑의 수도원 사제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은 수도원 자체로서의 지장이 있었던지 모두 거절을 해왔으므로,빈첸시오는 아무래도 이 목적을 위해서는 특별한 단체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곧 동료들을 모집해 한 회를 결성했다.
이것이 유명한 라자로(또는 빈첸시오회)회이다.
그 후 빈첸시오는 상부에 청원해 교구의 주임 사제직에서 떠나 제자들과 더불어 프랑스 국내를 순회하며 이곳 저곳에서 묵상회를 열었다.
또한 그는 자선 사업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서 동료들을 남녀 두반으로 나누어 각각 회를 조직하여 여자 회에는 주로 병자의 간호를, 남자 회에는 빈궁자의 구제를 위탁했다.
빈첸시오가 일생동안 개최한 묵상회는 실로 7백회에 달했다.
그리고 라자로 수도원은 그 후 전세계에 퍼져 여러가지의 자선 사업에 종사하며 사회에 공헌한 바가 컸었다.
그 수도원의 창립 기념일은 1625년 4월 17일이었고 그 본부는 파리에 두었다.
빈첸시오는 청소년 시절에 갖은 고통을 겪었던 만큼 불행한 사람들에게 동정도 남보다 배로 더 깊었고,틈만 있으면 병자나 죄수들을 방문해 그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또한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찾아서는 이를 카리타스 수녀들에게 맡겼다.
1619년 곤디의 알선으로 국왕 루이 13세의 임명을 받아 해군 전속 사제가 되고 나서는 점점 자선 사업을 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 동안의 유명한 한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면,
한 가족을 도맡아 살아나가던 사람이 징역살이를 하게 되어 하루의 양식에도 매우 곤란을 느끼는 아주 가난한 집안을 구출하려고
빈첸시오는 그 죄수를 대신해서 뱃사공 노릇을 하며 형무를 마쳐 주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자선 사업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버림받은 아이들, 타락한 여성, 고민하는 사람, 병든 나그네, 불쌍한 걸인들을 도와 준 횟수는 이루 셀 수가 없다.
또한 그가 얼마나 많은 빈궁자를 구했는가는 그의 손을 거쳐나간 자선금이 5백만 프랑이나 되었다는 사실로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빈첸시오는 교제술에도 능통해 상류인사들 사이에도 상당한 신용을 얻었기 때문에 자선에 투자하려고 하는 귀부인들은 그를 통해 했다.
빈첸시오의 사업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사랑의 자매회라 불리는 카리타스 수녀회일 것이다.
이 수녀회는 루이사 드 마릴락을 최초의 수녀원장으로 모시고,
1646년 교회와 정부의 인가를 얻어 점차로 세계의 각지에 진출해 병자의 간호를 본분으로 삼고,
날로 발전을 거듭해 금일에는 3만8천이상의 자매가 봉사하고 있다.
성인은 그 회원을 ’내 딸’이라 애칭하며 그들의 수덕을 위해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써 저 유명한 ’강의(講義)’를 저술했다.
이 외 7천통에 가까운 그의 서간도 영적 가치가 풍부한 것으로 존중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위대한 업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랑의 일꾼인 빈첸시오는1660년 9월 27일, 잠자듯이 고요히 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86세였다. 그는 1737년 6월 16일에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레오 13세는 1885년에 모든 자선 단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글에서
(Cf. Correspondance, Entretiens, Documents, ed.P.Coste, Paris 1920-1925, passim)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대개 자식이 없고 거칠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외적 차림새나 그들이 지닌 정신적인 능력을 보고 판단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신앙의 빛으로 본다면 그들은 가난한 이가 되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대신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당하신 수난에서 인간의 모습마저 잃으시어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시고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로 보이셨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분으로 보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우리는 같은 마음을 지니고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위로해 주고 도와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로 태어나기를 원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삼으시고 가난한 이들의 봉사자가 되셨으며
그들의 처지에 참여하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이(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당신에게 행해지는 것으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실 때 결국 그들을 사랑해 주는 이들도 사랑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그 사랑 안에 그이와 우정 및 봉사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까지도 포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 줄 때 약자와 곤궁한 자를 이해하려 힘쓰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고 말한 사도처럼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근심 걱정과 어려움에 깊이 동참하는 데 힘써야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자비와 동정심의 정신을 불러일으키시어 그것이 우리 마음을 채워 주고 또 늘 충만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하고 또 지체없이 행해져야 합니다.
기도 드리는 시간에 어떤 어려운 사람에게 약품과 도움을 베풀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 짜증을 내지 말고
그에게 가서 해주어야 할 것을 기도를 계속하듯이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돌보아 줌으로 기도가 중단되었다 해서 불안감이나 죄의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거나 하느님의 일인 여타의 일 때문에 먼저하던 하느님의 일을 중단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자 바치는 기도를 중단하면 그것도 하느님께 봉사를 바치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규칙에 우선하며 만사는 무엇보다 사랑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한 주인이므로 우리는 그가 명하는 대로 해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새로워진 열성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무엇보다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내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주인으로 또 지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빈센트 성인의 삶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인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사제로 활동하시면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었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며, 사람들의 영적, 물적 빈곤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냉철한 현실참여의 영성을 사신 분입니다. 성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았기 때문에,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습니다.또한 그 일들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많은 평신도들과도 마음을 합하여 일하셨습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