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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28 13:53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2)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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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920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2) 토마스 아퀴나스 ①

높은 학식과 겸손 겸비한 모범적 수도자

5~6살때 수도생활 시작… 신동이라 불려

성모님 공경하며 학문 탐구에 큰 열정 쏟아

발행일 : 2010-08-01 [제2708호, 10면]



두 말이 필요가 없는 분이다. 교회 박사 중의 박사다.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전개는 대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축일 1.28)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논리적 밑바탕을 만드신 분이다.


‘토마스 데 아퀴노’ 혹은 ‘토마스’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로카세카 성에서 1224년 혹은 1225년에 아퀴노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작의 아들이었던 만큼 살림은 풍족했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란돌프(Lhndulphus)라는 분이었는데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는 조카가 되고 하인리히 6세와는 종형제 사이다. 또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는 노르만디의 왕족의 친척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부모는 토마스가 5~6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회에 봉헌하여 수도생활을 하게 했다. 당시 수도원장의 이름도 아버지와 같은 란돌프였다. 수도원장이 토마스 아퀴나스 집안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도회에서 어린 토마스가 보인 덕행이나 학문의 진척은 놀라울 정도였다. 신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지적 지능이 우수한 것만이 아니었다. 성실했으며 늘 학문을 탐구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면 즉시 놀음을 그치고 스승에게 달려가서 질문하곤 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10세 때에 이미 보통의 다른 17, 8세 소년보다 더 많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수도원장 란돌프는 아직 어린 토마스를 나폴리의 대학에 입학시켰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초등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나폴리 대학은 당시 학생들의 풍기가 나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어린 토마스는 그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것만 찾았다. 세상 사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깊이 공경하고 있었다. 성모님께서도 그런 그를 늘 전구로 보호하셨다. 그가 도미니코회에 들어가는 데도 성모님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토마스가 14세 때 부모 몰래 베네딕토회를 떠나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당시 도미니코회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탁발 수도회였다. 부모는 아들이 미천한 수도회에 입회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들이 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전통 있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즉시 아들을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갔다. 당장 끌고와 베네딕토 수도회에 다시 보내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마침 토마스는 그때 장상의 명령에 의해 파리로 간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들을 다시 불러 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였다. 어머니는 토마스의 두 형을 시켜서 토마스의 뒤를 쫓게 했다. 결국 토마스는 형들에게 붙잡혔고, 집으로 끌려왔다. 부모는 그를 성에 가두고 일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감금생활을 한 것이 1년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성모님께 전구를 청했다. 전구는 받아들여졌다. 그는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성을 탈출할 수 있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다시 입회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학덕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그는 책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를 가장 좋은 서적이라고 칭하며, 묵상하고 하느님의 비추심과 은총을 받았다. 높은 학덕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삶의 모습도 완벽한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명, 정결과 청빈,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의 거울로 존경을 받았다.


그렇게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독일에서 신품성사를 받았고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252년에는 파리 대학에 초청을 받아 학문뿐 아니라 도덕에 관해서도 가르치게 되었다. 이후 1256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259년부터 68년까지 로마에서 교황청 소속 학원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탄생하는 것, 그리고 착수된 것이 유명한 성체 찬미가와 신학대전이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3) 토마스 아퀴나스 ②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깊은 영성으로 성체찬미가·신학대전 집편

1880년 모든 학교 수호성인으로 선포

발행일 : 2010-08-15 [제2709호, 10면]



1261년의 일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대 최고의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로마의 신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전수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토마스의 위대함이 한층 빛을 발하는 일이 생긴다. 당시 교회는 성체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약했다. 벨기에에서 시작된 성체 축일도 당시로선 몇몇 나라에서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은 성체 축일을 전세계 공통의 축일로 정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들어갈 성체찬미가가 필요했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당대 또 한 명의 석학이었던 보나벤투라에게 이 일을 맡겼다. 성체 찬미가는 영성적으로도 완벽해야 했으며, 신학적으로도 오류가 없어야 했다. 이에 보나벤투라와 토마스는 기도 안에서 성체 찬미가를 작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히 토마스의 찬미가를 보게된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하고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는 찢어버린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의 것을 채택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포함토록 했다. 그 내용이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날 어떤 영성가와 신학자도 이처럼 완벽하게 성체 영성의 깊이를 문자로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계의 불후의 걸작으로 남아있는 ‘숨마 테올로지카’(Summa Theologica), 즉 신학대전(神學大全)이다.


로마에 있을 당시 착수된 신학대전 집필은 이후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계속 진행됐다. 하느님께선 이 책에 각별한 축복으로 응답하셨다. 하루는 하느님이 토마스에게 나타나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토마스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문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작업들을 병행했다.


이런 가운데, 토마스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미사 도중이었다. 토마스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지금까지 열정을 다했던 집필 작업을 돌연 중단한다. 당시 토마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친구가 왜 글을 더 이상 쓰지 않느냐고 묻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순히 뛰어난 신학자이자 교회 박사로만 알아선 곤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토마스는 하느님과의 완벽한 일치 안에서 살았던 영성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학은 영성의 문자화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이 일 이후에 토마스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토마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토마스 사후 직후에 쓰여진 전기문들에 등장한다.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리용에서 공의회를 소집, 토마스를 부르자 토마스는 공의회 참석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토마스는 리용으로 향하던 도중 조카딸 집에서 중병을 얻는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 사람들이 그를 인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아직도 세상은 그의 신학적 해석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했다. 친구가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청했다. 토마스는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젠 그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려졌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323년에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 됐다. 1880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이 될 수 있을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요한 22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가 모르던 문제를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결할 때마다, 그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4) 토마스 아퀴나스 ③

성인의 주요사상 교회 공적 가르침으로 남아

리에 대한 이성적?지적 갈망으로 학업 정진

어머니 반대에도 도미니코 수도회 입회 결심

발행일 : 2010-08-22 [제2710호, 10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 주요 사상들은 곧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특히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간의 경계를 허문, 하느님 섭리에 의한 위대한 보화들이다. 이제 그의 영성에 대해 묵상해 보자. 하느님께서 그의 삶 안에서 어떻게 형성의 원리를 섭리하셨고, 토마스 자신도 또한 그 형성의 원리를 어떻게 실현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성이란 세상 만물을 당신을 향해 형성되도록 초대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포함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린시절에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기 마련이다. 토마스도 부모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부모님은 모두 왕족 출신으로, 토마스 또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데 부친과 달리 모친은 신앙적으로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부모의 뜻에 의해 토마스는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이후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교육은 수도원 교육이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 성취와 관련해 남다른 모습을 보인다. 뛰어난 이해력과 암기력은 신동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돋보였던 것은 호기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지적인 갈망이었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바로 스승에게 달려가 질문을 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해결을 해야 하는 성격의 소년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아는 척 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모른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한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식하다고 여기면 어쩌나 근심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데 누가 알려주겠는가.


여담이지만, 내가 37세 늦깎이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외국의 교수들은 학생이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말을 했더니 알 때까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집에 갈 시간인데도 보내주지 않고 기어코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도 시간이 모자라자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며 모르는 것이 또 나타나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었다.


토마스는 궁금할 때마다 물었고, 스승들은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 주었다. 자연히 토마스의 지적 성취는 날로 향상되어 갔다. 토마스는 역시 출중한 아이였다. 10세때 이미 18세 학생들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이미 고등학교 수준의 학업 능력을 갖춘 것이다. 이때 하느님은 토마스에게 또 다른 안배를 마련하신다. 초등학생 단계까지 부모님을 안배하셨다면, 청소년 시기에는 참 스승을 안배하신 것이다. 당시 수도원장 란돌프는 13세 토마스를 대학에 진학시킨다. 그의 참 능력을 알아본 것이다. 대학은 나폴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 대학이 문제였다.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던 이 대학은 상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고, 퇴폐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에 전념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토마스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자칫 하다가는 술과 성에 물들어 타락할 수도 있었다. 사람은 주위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살다보면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여러차례의 위기 상황을 접하게 되는데 이 대학생활이 바로 토마스의 첫 번째 위기상황이었다.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쾌락과 순간적인 즐거움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중학생 토마스는 오직 진리에 대한 탐구심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토마스는 수도회 입회를 결심한다. 도미니코 수도회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의 분노가 컸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속된 말로 다른 사람에게 밥을 빌어 먹고 다니던, 볼품없는 탁발 수도회였다. 어머니는 가문의 영광을 중시하는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닌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계속 성장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토마스의 형들을 시켜서 토마스를 집으로 잡아오게 한다. 토마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형들에게 잡혔고, 집으로 끌려왔다. 어머니는 그를 성의 감옥에 가둬 버린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외출 금지다. 토마스에게 또다시 찾아온 위기상황이었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5) 토마스 아퀴나스 ④

감금된 토마스 … 성모님과 천사를 체험하다

새로운 조력자 통해 지적·영성적으로 깊어져

오늘날 지성과 성덕의 등불로 널리 추앙받아

발행일 : 2010-08-29 [제2711호, 10면]



사람은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부유한 사람도, 명예와 지위가 높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가슴 철렁철렁 내려 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위기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위기 상황은 나 자신을 점검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위기를 형성적 기회로 보면 새로운 성장이 가능해진다. 토마스에게 있어서도 위기상황은 그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지금 토마스는 감금 상태다. 위기상황이다. 도미니코회에 들어갔지만 이를 반대한 어머니가 토마스를 성에 감금했다. 이때 토마스는 성모님과 천사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토마스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항상 보살펴 주심을 체험한다. 위기상황이 없었다면 이러한 체험이 과연 가능했을까. 위기상황이 얼마나 큰 열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후 토마스는 극적으로 성을 탈출했고, 결국 수도회에 갈 수 있었다.


이후 토마스는 18세에 정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게 된다. 이때부터 토마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의 이상을 펼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후 모든 공부와 수련을 마친 토마스는 사제서품을 받았고, 신학 교수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중요한 인물들을 잇달아 만나게 된다. 토마스의 형성을 돕는 새로운 조력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성 알베르토와 성 보나벤투라 등이다. 토마스보다 26살 위였던 성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토마스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된다. 토마스는 자신의 스승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차원에서 인간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 삶에 대한 연구를 했고, 그 결과는 이후 거대한 그릇으로 담아내게 된다. 토마스는 당대의 석학 보나벤투라를 통해서도 지적이고 영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는 이후 신학적 이성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매우 깊어진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보나벤투라가 극찬했다는 토마스의 성체찬미가는 단순한 학문적 성취만으로는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의 영성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47세 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쓴 모든 것은 내가 본 것, 계시된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48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그는 병든 몸이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운명했다.


이런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지성과 성덕의 등불이 된다. 토마스는 특히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성은 높은 단계의 하느님 인식을 깨달아가는 차원이고, 의지는 선(善)을 향한 노력이다. 이성으로 깨닫고 자각한 바를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때 바로 진정한 진리의 인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토마스가 시도한 지적인 노력을 지극히 단순화시켜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토마스는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형성하시고, 또 형성하도록 이끄시는 존재 자체로, 우주와 인간 등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라고 했다. 즉 완전히 선하신 분이다. 결국 인간이 이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만과 교만의 삶을 선택한 인간은 결국 죄의 수렁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에 인간은 회개하고 존재 자체,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는 더 높은 경지, 즉 신학적 계시를 언급한다. 지적인 학업 과정을 통해, 이성으로 우리가 깨달아 나가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직접 영을 통해서 계시해 주는 바를 깨닫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의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토마스에 의하면 이성을 통한 깨달음, 그리고 계시를 통한 깨달음 두 가지를 잘 수용하고 통합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알겠다는 인간적 노력, 이를 성취하기 위한 선한 의지, 하느님 계시를 향한 열려 있는 열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게시물은 webmaster님에 의해 2014-03-15 12:11:11 우리의 신앙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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