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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03 21:31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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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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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앙의 상태와 신학 흐름에 관한 문제 제기는 과연 무엇인가? 지난 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서문에 나오는 '행운의 한스' 이야기를 소개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계속해서 미국 개신교 신학자 하비 콕스(1929~ )가 「세속도시」에서 인용한 바 있는,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라는 비유를 제시한다. 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 곡예단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곡예단 단장은 출연 준비를 하던 광대를 이웃 마을로 보내 도움을 청한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에 불씨가 옮아 그 마을에도 화재가 번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의 광고나 일종의 홍보로만 생각해 손뼉을 치고 웃기만 한다. 결국 불길은 마을에까지 번져 손 쓸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비유 이야기는 오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마주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설명한다. 현대인에게 신앙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임무와 역할이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인이 내적으로는 소중한 신앙 유산과 교회의 영적 자산을 스스로 포기해 버릴 위험에, 그리고 외적으로는 종교와 신앙 자체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종교적 무관심', 또는 모든 종교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무차별주의'에 직면해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메시지다. 사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신앙의 해를 맞이해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 질문이자 과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뒤이어, 이제 믿음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간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사도신경의 첫 시작인 '나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믿음이란 한 마디로 인간의 한 실존적 태도와 자세, 즉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과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 신앙이란 새로운 존재론적 안목과 전망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신앙이 세상의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식과 자각임을 말해준다.

 

 문제는 믿음의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와 성격이 오늘날 현실주의적이며 행동 지향적인 경향 속에서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물론이나 물신사상의 결정적 오류는 물론이고, 철학적 실증주의와 현상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적 흐름이 현대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초월적 능력을 부인하면서 진리에 대한 인식을, 행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에만 한정시키려 한다.

 

 인간의 믿음에 관한 기본 성찰은 신론의 문제로 연결된다. 오늘의 믿음이 드러내는 하느님 표상은 과연 무엇인가?

 

 베네딕토 16세는 성서적 신() 신앙에는 위격과 존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나뉠 수 없이 결합돼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 안에서의 위격적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 체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존재론적 초월성에 의해 조화로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의 예수님이 요한복음서에서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초월적 말씀(로고스)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렇듯 성서적 신 신앙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측면의 조화와 통합이 초기 그리스도교 발전 단계에서도 역시 반복돼 나타남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탈출기 3 14절에 나오는 "나는 있는 나다"라는 존재론적 신적 언명이 그리스 철학적 배경에서 자라난 초세기 교부들에게 호소력 있게 작용해, 성서적 신 개념과 그리스 사상 연계를 이룩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모든 역사를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교는 철학자의 신을 받들고 이교의 신들에 역행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정화를 과감히 단행하였다"(140).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존재론의 결합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미 성경 자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선택과 결단 과정의 핵심은 바로 '모든 신화에 반대되는 로고스(Logos)의 선택'이었다. 그 대표적 예로 요한복음 1 1-18절의 로고스 찬가를 들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 개념과 '로고스' 개념은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사상의 균형 있는 결합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신관의 통합 과정, 즉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과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의 결합 과정은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통해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관의 결합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 결정적으로 구체화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유다-그리스적 사고 지평의 확장을 통해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로서 선포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 본래의 '원체험'이 초기의 '증언' 단계를 거쳐 '역사적 해석'의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니케아(325)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381)와 에페소(431)를 거쳐 칼케돈(451)에 이르기까지 제1~4차 보편공의회에서 이뤄진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핵심 교의 정립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 개념과 용어들이 많이 도입돼 사용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해석과 선포의 발전 과정을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전승 본연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로 포함시키는가,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성에 따른 하나의(첫 번째) 토착화 과정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판단에 관한 논쟁이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는 전자(前者)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으며, 3세계 일부 신학자들은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한다. 전자의 입장을 성경과 전승에 기초하면서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논리적 분석과 성찰을 중시하는 서구 스타일의 고전적 신학이라 한다면, 후자의 입장은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중시하여 공동선과 토착화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신학적 성찰을 전개하는 제3세계 중심의 신학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2006 9 12일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행한 베네딕토 16세의 연설에서도 이 주제가 다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로고스 개념의 성서적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서적 신앙의 그 모든 힘들고 구불구불한 길이 목적에 이르게 되고 그 종합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사상의 만남을 볼 때, 그리스도교가 동양에서 발원하고 중요한 발전을 이루기는 했어도, 궁극적으로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베네딕토 16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헬레니즘' 필요성을 내세우는 제3세계 신학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말 대신에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럽 문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사실상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수없이 많은 역사적 조정 과정을 거쳐 이뤄진 종교적ㆍ사상적ㆍ문화적 가치와 그 표현의 총화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로부터 서구 문화적 요소를 분리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실제 과정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복음 가치의 발견에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논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의 머리말은 말한다. "토착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서로에 그리고 진리에 열려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토착화'에 관한 논지는 이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완성론' 혹은 '성취론'적 전망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 머리말에서는 특히 아시아적 맥락이 고려된 함축적 표현이 이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시아 문화의 복음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식별과 정화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겨레들이 그 민속 신앙에 있어 이미 그리스도 신앙의 적지 않은 부분을 제 나름대로 표출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특히 고통받는 하느님과 자애로운 어머니가, 성경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는 신앙의 중심적인 표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들도 일깨우는 바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음은 물론이다"(33).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진리를 향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실재 중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의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우상숭배를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이 여러 이단적 주장과 싸우며 신앙 진리를 찾아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참다운 진리를 향한 결단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라는 핵심 개념을 통한 통합적 신 신앙이야말로 베네딕토 16세의 신학 사상의 기본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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