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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0-26 22:2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1>요한 밥티스트 메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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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4,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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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1>요한 밥티스트 메츠(하)

신앙을 개인 영역에서 사회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교회 내 문화적 다원주의와 정치신학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종교 간 대화와 교회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관련해 메츠는 진정한 세계교회가 되기 위한 전제로 △역사적인 신뢰 △예수 추종의 실천 △고통의 기억을 통한 보편적인 소통 능력을 제시했다.

 메츠는 교회가 참으로 세계교회가 되기 위해선 유럽중심주의와 교회의 단일성을 방어적으로 고수하려는 관료적인 중앙집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 또 그리스도교의 원천과 긴밀히 결합돼야 하고 더 나아가 이 원천이 다른 문화와 만남에서 매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특히 성경의 두 가지 근본 유산, 곧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정의, 민속적-문화적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하는 문화(타자를 인정하는 문화)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를 추종하는 신비적이고 정치적인 실천 속에서 세계교회로 구체화될 수 있다. 여기서 실천은 가난한 이들과 타자를 존중하는 선택을 의미한다.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의 수난을 증언하고 하느님 정의를 수행할 때 진정으로 세계교회로서 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한 원천인 고통의 기억을 토대로 타자의 고통을 기억할 때, 교회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도 보편적 교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다양성 안에서 인정의 문화를 세계화(보편화)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며, 세계의 평화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서로 인정하는 책임을 다하도록 이끌기 위한 생산적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와 정치신학

 메츠의 정치신학은 근대 사상의 격랑과 회오리 속에서 형성됐다. 그런 만큼 메츠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근대적 사고에 방어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오히려 근대의 모색과 구상을 비판적, 생산적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그가 근대적 사고에 직면해서 그리스도교 대화 방식을 '생산적 비동시성'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면에서 우리는 그의 신학을 '계몽을 넘어선 계몽'을 지향하는 신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메츠의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모색하고, 인간을 '연대적인 주체'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메츠의 모색을 오늘날 낡은 시도로 받아들이거나 시대에 부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메츠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체의 해체 과정'이라고 진단하고 근대화 과정이 극단화된 형태로 파악한다. 즉 주체가 이성의 도구화를 통해 '또 다른 미성숙'으로 휩쓸려 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이 또 다른 형태에서 미성숙하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다. 개체화된 인간은 근대의 기술적 진보 사상으로 형성된 시민사회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이고, 윤리적 문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인격적 결단까지도 제거해 버린다. 이 때문에 메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방식에 회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는 이성의 보편타당한 합의를 목표로 삼지 않고 불일치, 다원성 그리고 서로 다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하나를 강조하는 사유나 윤리의 보편타당성 문제와 같은 큰 담론을 거절하고 작은 이야기를 중요시한다. 이를테면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하고 서로 다른 실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메츠는 서구철학의 전체주의적 사고가 형언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로 표현되는 재앙은 근대적 사유를 총체적으로 문제 삼는 사건이다.) 그는 또한 삶의 세계가 다원적임을 인정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츠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하나임을 추구하는 사유는 서로 구별돼야 한다고 보며, 상호관계성을 상실한 다원주의적 사유의 파편화 경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서로 상관성이 없고 또 행동과는 동떨어진 다양성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폭력이 둥지를 틀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이고 동등하다는 생각을 위험천만한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유다인들이 가스실로 보내지기 전부터 이러한 하나됨에서 원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봉쇄되지 않았는가?"

 '거만한 다원주의'는 결국 보편적 책임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메츠는 이를 우리 삶이 개인주의에 이르는 형태로, 비판적 책임이 없는 관망자 성향 혹은 우리 세계의 위기와 고통의 현실 앞에서 부초처럼 떠도는 것과 같은 관계로 특징짓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편적 윤리가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유에서는 보편적 윤리를 유효하게 하는 합의의 원리가 불충분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합의를 모두에게 보편타당하게 요구할 수 없고, 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지평일 뿐이며 바로 그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것은 그저 왜소한 윤리일 뿐이다. 이 윤리는 마지막엔 사회시스템에 대한 무책임한 적응 능력으로만 나타난다. 메츠는 오늘날 보편적 윤리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왜소한 윤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것이고…, 위험 상황에서는 자기실현마저도 쉽게 포기하는 것을 간단히 허용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갈등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소하게 하고, 보편적 동의와는 달리 모든 것이 다 똑같다는 식이다…. 이러한 왜소한 윤리는 만족하는 다수를 위한 윤리이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불만족하는 소수를 고려하지 않는 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후에 직면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스도교 희망을 말할 것인가. 문화와 종교 세계의 다양함 속에서도 모두에게 타당하고 보편적인 진리의 척도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포스트모던의 시장에 내어주고 말 것인가. 이에 대한 메츠의 응답은 하버마스가 메츠와 논박에서 언급한 바처럼 '암시적'일 뿐이다. 메츠는 합리적 근거를 엄격하게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 대신 '고통의 기억'을 대화를 통해서 보편적인 책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척도로 제안한다. 그러나 '기억'의 범주만으로는 상대화의 위험이나 새로운 폭력의 대두, 사회적 모순을 해소할 수 없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메츠의 정치신학 의미와 평가 


 메츠의 정치신학의 전체적 윤곽은 근대와 오늘날의 위기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생산적 비동시성'(근대의 기획과 연대하나 시민사회의 주체와 종교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메츠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이라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복음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적 이성을 토대로 동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과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환원하거나 축소한 신학적 프로그램을 거슬러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을 신학적 사유에 중심에 놓았다는 점은 분명히 정치신학이 이룬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메츠의 정치신학은 또한 '맥락적 성격'을 지녔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더불어 인간 실존과 역사의 의미를 기억하는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통의 기억을 통해 승자의 역사 안에서 배제되고 망각된 고통당하는 이들의 자취를 찾은 점, 또한 그들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면서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주체의 신학을 모색한 점은 메츠의 정치신학이 이바지한 큰 공헌이다. 메츠의 정치신학이 지닌 맥락적 성격과 관련해서 그의 신학이 남미의 해방신학(메츠 역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다)을 비롯해 이른바 제3세계 신학 토착화에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메츠의 정치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신학적 해석학의 수단을 해방하는 기억의 서사에서 찾았기에 '요청적 성격'을 지닌 신학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은 기억과 서사를 통해 전승되고, 서사의 기억은 전승의 실천을 통해 역사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폐기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계시가 다만 서사의 기억만으로 만족스럽게 보증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는 비판적 성찰이 불가피하다. 메츠의 정치신학이 지닌 근본 문제는 서사적 매개와 논증적인 성찰을 뒤섞어 놓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메츠의 정치신학에서 철학과 신학의 긴장은 서로 차별화되지 않은 채 '신학적으로' 용해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성격 규정에 앞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메츠의 정치신학은 근본적으로 '예언자적이고 신비적인 얼굴'을 지녔다는 점이다. 특히 하느님을 향한 깊은 열정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예민하게 읽고, 인류의 고난 역사를 껴안고 씨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외에도 메츠의 정치신학이 고통당하는 타자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고 타자와 그 타자성을 존중하는 인정의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신학에 큰 자극과 영감을 제공한다. 모든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호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복음을 신학적 사유 중심에 두고, 이를 역사와 사회의 맥락과 관계 속에서 해명한 정치신학의 기획은 언제나 유효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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