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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0-11 08:4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6>한스 큉(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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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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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16) 한스 큉 (상)

교회 기초는 제도 조직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의 고백

열정과 논쟁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 1928~ ) 신부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신학적 연구를 열정적으로 수행하면서 많은 저서를 집필한 신학자다. 우리 시대에 중요하게 부각된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를 탐구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종말론, 신학적 방법론, 세계 윤리, 세계 종교들, 그리고 종교와 문학의 관계를 다룬 저작을 남겼다.
큉의 저서가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고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면서 그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자가 됐다. 우리말로 번역된 단행본만 해도 스무 권에 가깝다. 그는 또 다른 이유에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신학적 이견 때문에 교회 교도권과 공개적인 갈등과 마찰을 빚은 것이다. 이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관점도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비판으로 엇갈린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그의 6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신학 논총에서 "한스 큉은 20세기 신학에서 하나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평가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한스 큉 신부의 생애를 단계별로 살펴보면서 그의 신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조명해본다.

- 젊은 시절의 한스 큉.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 수르제에서 태어나 루체른에 있는 김나지움(인문계 중등교육기관)에서 수학했다. 전통적인 가톨릭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큉에게 김나지움 교육은 근대 문학과 예술은 물론 근대 정신 전체에 열린 자세를 갖게 해줬고,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는 개신교, 유다교 학생들 간 교류를 가능케 해줬다. 이런 교육은 나중에 큉이 근대 정신과 화해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교회일치와 타 종교와 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는 데 씨앗이 됐다.
1948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큉은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 진학해 1955년까지 철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이수한다. 이 기간 예수회가 운영하는 독일어권 신학생을 위한 신학원 '게르마니쿰'에 머물면서,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정신에 따른 엄격한 사제 양성 교육을 받는다. 그는 처음에 당시 신스콜라 신학과 규율에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로 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청과 신학의 경직성, 신학원의 일부 융통성 없는 규율에 의문을 품으면서 비판의식을 갖게 됐다고 고백한다. 로마에서 교육이 끝날 무렵인 1954년 큉은 사제품을 받는다. 로마에서 신학 기본 과정을 마친 큉은 프랑스 파리로 자리를 옮겨 소르본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1955~1957).

개신교 신학 거장 칼 바르트와 의화론

큉의 박사학위 논문 「의화론」은 스위스 출신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K.Barth, 1886~1968)의 의화론과 트리엔트공의회에 나타난 가톨릭의 의화론을 비교한 것이다. 큉은 이 논문에서 두 의화론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며, 차이는 교회 분열을 일으킬 만큼 큰 것이 아님을 밝혀냈다. 가톨릭과 개신교 벽이 아직 매우 높았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상황을 고려할 때, 종교개혁 시발점이 됐던 의화론에서 양편의 의견 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 큉의 논문은 신학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된다.
칼 바르트는 큉의 논문에 "만일 당신이 당신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전개한 의화론이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면, 나는 나의 의화론과 당신의 의화론이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칼 라너(K.Rahner, 1904~1984) 신부는 큉의 의화론이 가톨릭의 통상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론 가톨릭 의화론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큉은 칼 바르트가 타계할 때까지 그와 신학적, 인간적 교류를 지속했다. 큉 스스로 바르트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바르트의 용어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소위 무한한 차이'라고 표현되는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경외심 △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 △ 인간은 이 계시 사건을 '오직 신앙을 통해서 적합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론 연구

한스 큉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스위스 루체른으로 돌아와 한 성당에서 1년 반(1957~1959) 보좌신부를 지낸 뒤 본격적으로 학문 활동을 시작한다. 독일 뮌스터대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신학 조교로 있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대 가톨릭 신학부 교수로 초빙받아 부임했다. 1964년에는 동 대학 부설로 새로 설립된 교회일치신학연구소 소장 직책을 겸임했다. 큉은 같은 대학의 개신교 신학부 교수들, 특히 신약성서학자 에른스트 캐제만(E.Kasemann, 1906~1998)과 만남을 통해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을 적극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큉의 신학, 특히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큉의 튀빙겐대 교수 부임 2년 후인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고, 그는 공의회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시기 그는 교회론에 집중하며 「공의회와 재일치. 쇄신, 일치에로의 부름」(1960), 「교회의 구조들」(1962), 「공의회에서의 교회」(1963) 등을 출판했다.
큉의 교회론 연구는 1967년에 출간한 「교회」에서 정점을 이룬다(이 책의 축소판 「교회란 무엇인가」는 1978년, 원저는 2007년 우리말로 출판됐다). 그는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를 종합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근거로 교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 공동체로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교회의 본질적 요소다. 교회 기초를 이루는 것은 고유한 예식이나 제도, 특정한 직무를 포함한 고유한 조직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고백이다.
예수의 핵심 관심사는 하느님 나라였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 공동체인 교회는 당연히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이어가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전령(傳令)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철저히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이 아니라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고, 강제와 무력을 배제한 헌신적 봉사를 수행하며, 죄를 멀리하더라도 결코 죄인을 내치지 않는 자비의 공동체가 돼야 하고, 자신의 업적에 의존하지 말고 철저히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큉은 교회가 신앙인 공동체임을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교계제도와 동일시했던 공의회 이전 시각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과거에 소홀히 다뤄졌던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을 부각시킨다. 또한 교계 직무는 성령의 다양한 카리스마 중 하나로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한 봉사 직무로 이해한다. 교황직에 관해서는 교회론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면서 그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봉사로서, 교황 수위권은 법적 권력이나 지배가 아니라 '봉사 수위권''사목 수위권'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20세기 교회론의 대가 콩가르(Y.Congar, 1904~1995) 추기경은 큉의 교회론이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바오로 신학에 근거해 교회의 카리스마적 차원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과거의 교회론이 교회를 가시적인 머리인 교황으로부터 연역해서 생각했지만, 큉이 교회 발달에 대해 먼저 관심을 두고, 교계제도와 교황을 마지막에 다룬 것은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콩가르는 큉이 교회 전통과 직무에 대해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교부들의 교회론이나 교회의 성사적 측면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교회 전체의 사도적 계승만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 직무자를 통한 사도적 계승의 측면은 소홀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큉의 교회론에 찬성 못지않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비판의 목소리에는 교황청 신앙교리성도 포함돼 있었다. 1967년 12월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조사를 위한 '대화'가 있기 전에 이 책의 보급과 번역을 금지한다고 통보했고, 그 다음 해 9월 큉을 소환했다. 하지만 큉은 공정한 '대화'를 위한 조건이 선결돼야 응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견조율을 위한 양편의 협상이 시작됐다.

교황 무류성 논쟁

큉은 「교회」에서 전개한 교회론의 실천적이며 비판적 측면을 1968년 「진실성,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에 담아 출간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교의 선포 100주년을 맞아 1970년 출간한 「무류라고? 하나의 질문」에서 그의 비판은 실천을 넘어 교의 문제로 향한다. 큉의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성 때문에 무류적 문장이나 표현은 있을 수 없다. 절대적 무류성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하는 것으로서 공의회도, 교도권도 무류적 문장을 만들 수 없다. 교회가 진리 안에 머물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무류적 문장이나 제도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교회는 인간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약속 덕분에 복음의 진리 안에 유지된다.'
큉의 주장은 가톨릭 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는 1971년 한 신학 잡지 기고문을 통해 단호한 반대 의견을 밝힌다. 교회가 하느님 계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큉이 부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나 '회의적 철학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공격한다. 같은 해에 신앙교리성은 조사 대상에 「무류라고? 하나의 질문」<사진>도 추가했고, 독일 주교회의도 이 책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구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 1986년 사제 수품(서울대교구)
▲ 1992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신학 박사학위 과정 수료
▲ 1996년 가톨릭대 대학원 교의신학 전공. 신학박사
▲ 저서 : 「일곱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성사 각론」,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등
▲ 번역 : 「희생양은 필요한가?-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

[평화신문, 201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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