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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0-02 05:52
   '작은 길'의 영성, 성녀 소화 데레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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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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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이나 질책, 판단이나 비방 등이 우리에게 해당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 들이 누구를 해칠 수 있을까요? 아무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좋게 이야기하는 칭찬도 우리를 자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누구를 자만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의나 사랑의 의무 때문이 아닌 이상,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을 낮추기 위한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10 1일이면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리지외의 이 작은 성녀를 기리는「포교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동정 대축일」을 지낸다. 수녀원에 들어가기전 로마를 순례한 것 이외에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고, 그후 9년동안 봉쇄수녀원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만 이 `작은 성녀'가 어째서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 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재임 1939-1958)가 그녀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 더불어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1944 5 3일에는 잔다르크(요안나) 성녀에 이어 소화데레사를 프랑스 제2의 수호자로 선포했던 것이니, 이로써 `한 알의 모래'라고 부른 데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녀가 되었다.

 

성녀의 축일은 10 1일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정확하게 1897 9 30일 저녁 7 20분이었다.

9 30일 목요일, 죽음의 그날. 둘째 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는 아침미사 동안 곁에 있었는데, 데레사는 한마 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이 진해서, 허덕이며 호흡이 곤란했다. 그 고통이 비길데 없다는 것을 언니도 알아보았다. 데레사는 잠시 손을 모아 침대 바로 맞은 편에 두었던 성모상을 바라보면서, "아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성모님께 기도했 던가! 그렇건만 약간의 위로조차 없고, 순전히 임종의 고통뿐입니다.."하는 것이 었다.

 

데레사는 온종일 쉴새없이 계속 고통을 겪고 있었다. 기운이 다 빠진 듯이 보이 더니, 갑자기 일어나 침대위에 앉는데, 주위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어머니, 보십시오. 오늘은 이렇게 기운이 납니다! 죽을 것 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몇 달 더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이제 제가 죽는다고는 믿지 않겠습니다. 그저 고생한다 는 것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보다 더하겠지요. 괜찮습니다. 더욱 좋아요."

 

"아아, 하느님!...저는 사랑합니다...당신을!....좋으신 성모님, 오셔서 저를 도와 주십시오. 만약 이것이 임종이라면, 죽음은 또 어떻겠습니까?!!..아아, 어머니, 고통의 잔은 가득 찼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주님은 저를 버리신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습니다." ", 하느님, 원하시는 대로 다 하소서. 하지만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니, 언니! 저를 위해 빌어주세요! ...아아, 하느님! 하느님! 그토록 좋으신 분이시건만! ! 정말 당신은 좋으신 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후 3시쯤 데레사는 팔을 십자형으로 벌렸다. 원장 수녀가 무릎 위에, 가르멜 산의 성모님 성화를 얹어주자, 그걸 잠간 바라보더니, "아아, 어머니, 저를 성모님께 바쳐 주십시오. 잘 죽도록 준비를 갖춰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원장이, "자매님은 항상 덕을 실천했으니, 준비가 다 돼 있어요" 하자, 데레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말입니다. 저는 진리만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습니다. 저는 마음의 겸손을 깨쳤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제가 고생하고 싶어했다고 쓴 것은 다...아아! 그 건 다 정말니다!" 확신을 가지고 death.jpg데레사는, "저는 `사랑'에 몸바친 것을 뉘우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아아, 아닙니다. 저는 사랑에 몸바친 것을 뉘우치지 않습니다.되려..."하고는 말문을 닫았다가, 한참 후 다시,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수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코! 결코! 이건 제가, 영혼을 구하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기에 그런가 봅니다.. 그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고통중에서 데레사는,"저는 숨도 못 쉬겠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후 "저는 아직도 더 고생하고 싶어요." "저의, 가장 작은 원의까지도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죽는다는, 제일 큰 소망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임종의 고통은 그로부터 두시간도 더 계속되었다.

 

 

 

예수 아기와 거룩한 얼굴의 데레사 성녀(Saint Therese de I'enfant-Jesus et de la face) 1873 1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알랑쏭에서 루이 마르텡(Louis Martin, 1823-1894)과 젤리 게랭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능한 시계공에 보석상이었던 아버지 루이 요셉 스타니슬라스 마르텡은 데레사가 태어날 때는 이미 현업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서른다섯 살에 스물일곱 살의 착실한 공예사 젤리를 만나 결혼했는데, 결혼 전 1845 9월에 그는 수도자가 되려고 알프스산 꼭대기의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을 찾아갔으나 라틴어 공부를 다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젤리 역시 수녀가 되려고 성 바오로 빈첸시오 수녀원을 찾았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입회하지 못했다. 이 때 젤리 게랭은 "하느님, 저는 언니처럼 당신의 정배가 될 자격이 없은 즉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자녀를 많이 낳게 해주셔서 그들을 모두 당신께 바치게 해 주십시오"라며 그분께 매달렸다. 이들 두 사람은 1858 7 13일 알랑쏭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았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했다고 한다. 데레사의 가족들은 교회의 성사 생활에 열심했고,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러한 성가정의 화목한 분위기는 데레사의 성격과 신앙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데레사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에서, 가르멜에 들어가기까지의 자신의 영혼의 내력을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 시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행복했던 어린 아기 시절이고, 둘째 시기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시련의 겨울' 이라고 묘사한 시기, 즉 리지외로 이사한 후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서 혹독한 세심증을 경험한 8(1877-1885) 동안의 시기를 말하며, 그 마지막은 1886년에서 1888년 까지의 깊은 내적 회심의 경험을 통해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는 시기를 가르킨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두 가지로 저의 어머니가 되시는 당신께 제 영혼의 내력을 숨김없이 말씀드립니다. 원장님이 이것을 하라고 제게 말씀하시던 그날 저는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질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만, 그 후 예수님께서는 그저 순명만 하면 당신의 뜻에 맞으리라는 것을 때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럴뿐더러, 저는 길이 부르고 또 불러야 할 노래, `주님의 자비 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한다는 이 한가지 일만 할 작정입니다...."

 

1895 1월 예수 아기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둘째 언니이자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장으로 있던 예수의 아녜스 수녀에게 보낼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쓸 당시 데레사는 마르탱 부인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로 선택했던 이 언니 폴리나 밑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데레사가 자신의 삶의 내력을 쓰게 된 동기를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1910 8월 성녀의 시복ㆍ시성을 위한 법정에 출두해서 증언한 기록이 남아있다. 1895년 겨울 저녁, 데레사가 임종하기 2년 반 전의 일로서, 아녜스 수녀는 마리아와 데레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데레사는 언니들에게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이 때 마리아 수녀가, "원장님, 우리가 그 말을 전부 글로 써서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만일 원장님이 예수 아기의 데레사 자매에게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쓰게 하시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되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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