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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14 21:2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7)> 칼 라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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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2,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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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초월성' 주장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20세기를 빛낸 가톨릭교회 신학자 중에서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만한 인물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형 후고 라너(Hugo Rahner, 1900~1968)와 더불어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 영성가이자 사목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단지 가톨릭교회의 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폭넓고 깊은 숙고를 바탕으로 현대 세계에 이정표를 제시한 사상가였다.

 

 

 #부모에게 책을 헌정한 라너 형제

 

 라너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요셉 에리히 라너(1868~1934)와 어머니 루이제 라너(1875~1976) 1896 10 20일 결혼해 7남매를 뒀다. 그 중 후고는 칼보다 3년 먼저 예수회에 입회해 나중에 인스브루크 신학대에서 교회사와 교부학을 가르쳤다. 두 아들 칼과 후고는 아버지의 60세 생일을 맞이해 자신들이 집필한 375쪽에 달하는 책을 아버지께 헌정하기도 했다.

 

 교사인 아버지는 독일어, 불어,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자녀에게 교육과 인문과학의 가치를 알려주며 자신의 자녀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도록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독일의 전형적인 가톨릭 어머니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녀들 학문 여정을 동반했지만 그것은 학문적 차원이라기보다 인성과 신앙 차원이었다. 특히 칼과 후고의 학문적 성공을 기뻐하기보다는 그들이 교만해질까 봐 염려했다고 한다. 라너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도록 가르쳤고, 나아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아버지의 60세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75세 생일에 칼과 후고는 자신들 강론과 강연 원고를 책으로 엮어 어머니께 헌정했다.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감각을 지녔다. 첫째 아들 게오르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수용소에 갇히게 되자 그녀는 직접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 자신은 자녀에게 자기 사랑을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들 후고가 뇌종양으로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퍼하기보다 아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말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준주성범」을 즐겨 읽은 10대 시절

 

 1910년 학교에 입학한 칼은 처음엔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다. 그는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아이였고, 성적 또한 중간 정도였다.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많아, 수업을 받지 않으려고 교실에 악취탄을 뿌리기도 했다. 또 교사에게 거짓말을 해 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독일 학제로 8학년이 되면서 최고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을 지닌 칼은 생각하는 학생이었고, 잘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칼은 종교교사 마인라드 포겔바허(Meinr ad Vogelbacher, 1879~1965)에게 영향을 받았다. 포겔바허 교사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지적이며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고, 라너의 집안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러 종교를 가르쳤는데, 편견 없는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 방식이 제자 칼 라너에게 철학적ㆍ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칼은 「준주성범」을 영적독서로 읽곤 했는데 그 당시 십대 청소년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격렬한 운동보다 산책을 선호했다. 주말엔 산장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만나곤 했는데, 이 모임을 통해 당시의 유명한 가톨릭 사제인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를 만나게 됐다. 라너는 후에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수강했는데, 결국 라너는 1964년 뮌헨대학교에서 과르디니 후임으로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예수회 입회

 

 1922년 칼 라너는 최종성적 '매우 우수'로 학교를 졸업했다. 장래 희망 학업으로 '신학'을 선택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예수회에 입회했다. 말년의 라너는 자신이 왜 예수회에 입회했는지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신비스러운 성소 경험과 같은 극적 체험은 없었다고 했다. 예수회원이 된 이유는 신앙의 뿌리가 깊은 가정 분위기와 성격 탓이라고 했다.

 

 라너는 공동체 삶을 추구하는 수도생활을 선호했고, 다양한 형태의 수도생활 중에서 전례 위주의 삶보다 좀 더 개방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다. 또한 자신이 사변적 성격이어서 예수회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펠트키르흐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곳에선 형 후고가 수련을 받고 있었지만, 형은 동생의 성소를 알지 못했다. 동생 칼이 성소에 관해 형에게 털어놓지 않아서였다. 형 후고는 동생 칼의 편지를 통해, 부모는 학교 종교교사를 통해 칼이 예수회에 입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포겔바허 교사는 칼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투덜대는 성격이라, 예수회원이 되기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칼 라너는 형 후고의 뒤를 따라 1922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의 수련 동기는 무려 56명이나 됐다. 라너는 수련원에서 예수회원이 되기 위한 기초 교육을 받았는데, 하나는 이냐시오 영성을 자기 자신과 통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삶과 성소를 시험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련원 규칙생활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즐길 정도였다. 그는 아침에 일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모든 일을 주로 오전에 다 해결했다. 수련원에 살면서 그는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목표를 추구하지 않았다. 단지 수도의 기초와 영적인 저작들에 집중했다.

 

 그는 「등대」라는 잡지에 기도에 관해 기고했는데 그의 글은 나중 그의 철학적 신학적 기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작아지고 좁아지며 결국 그들에 의하여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하십니다"(야고 4,8 참조). 이 글에서 그가 평생 주제로 다룬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무한성을 엿볼 수 있다. 칼 라너는 유한한 것을 넘어서 정신은 지상의 것에 자신을 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평생 주장했다.

 

 #초월철학과 신비주의 체험 공부 병행

 

 2년간 수련생활 후 그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요셉 마레샬(1878~1944) 그리고 피에르 루세로(1878~1915)에 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에릭 프르치바라(1889~1972)에게 강의를 들었다. 라너는 특히 요셉 마레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셉 마레샬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를 접목하려고 시도했던 벨기에 예수회원이자 철학ㆍ심리학 교수였다. 철학에서 마레샬이 사용한 방법을 일컬어 초월론적 방법론이라 한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한층 풍요롭게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라너는 마레샬의 초월철학 이외에도 신비주의와 신비체험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초월적 정신을 소유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골몰했다.

 

 철학 공부 이후 2년의 실습과정 끝낸 그는 네덜란드 발켄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주로 그리스와 라틴 교부를 탐독했다고 알려졌고, 오리게네스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때 양봉에 취미를 가졌는데 라너의 부지런함이 꿀벌을 본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사제수품(1933)과 제3수련이라는 예수회 마지막 양성과정을 마친 라너는 1934년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이 대학에는 마틴 하이데거(1889~1976)가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라너는 예수회 동료 요한네스 밥티스트 로츠(1903~1992)와 함께 그의 세미나를 수강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개념은 라너에게 인간을 구체적인 실존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줬다. 라너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실존하면서 자신의 한계성을 넘어서려는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유한적 인식의 형이상학 - 칸트, 마레샬, 하이데거의 개념을 이용한 해석'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논문을 제출한 후 그는 곧바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신학교수가 됐다. 하지만 라너는 1937년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지도교수가 논문 인준을 거부해 자신의 철학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라너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탈락된 철학논문은 1939년에 「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라너는 한참 후인 1970년에 인스브루크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규성 신부

 ▲1995년 수품(예수회)

 ▲서울대 졸, 독일 상트 게오르겐 예수회 신학대 교의신학 전공, 신학박사

 ▲2005~현재 서강대 교수

 ▲2013~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주요논문 : 이냐시오 영성과 칼 라너 신학, 칼 라너의 그리스도론에서 나타나는 인간학의 수용 과정 및 그 체계적 이해, 칼 라너의 신학에서 철학의 역할 등

 ▲번역서 : 「로욜라의 이냐시오」(슈테판 키흘레 지음/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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