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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6 01:25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루카 8, 1-3) - 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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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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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80
2016년 9월 16일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루카 8, 1-3)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카 8, 1)

오늘은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입니다. 먼저 위의 두분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위의 두 분에 대해서 굿 슈스에서 소개한 내용을 인용해 드립니다. 

로마(Roma)의 평범한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이 순교한 후 여러 사정으로 14개월 동안 지연되었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극심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기간 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었다. 그는 배교자들에게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한편,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며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황으로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새 교회를 세운 대립 교황이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던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여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교회회의는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체포되어 첸툼첼레(Centumcellae, 현재 로마의 항구도시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이듬해 6월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에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루치나(Lucina)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라틴어로 새겨진 최초의 교황 비문이다.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내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Coelici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249년 초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Roma)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아 안 되는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과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목여정에 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된 몇몇 여자도 함께하고 있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이들이 에수님을 따라다닌 이면에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나라는 어떠한 나라이겠습니까? 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라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 1)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바로 ‘밭 임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밭임자가 어떠한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 1절 이하에서 설명을 계속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 임자는 바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아침 일찍와서 일을 한 사람이나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 같은 보수를 지급합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계약한 바대로 지불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계약에 근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받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많이 일을 한 사람이 부당함을 토로합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이해의 관점에서 접근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소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존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나의 조그만한 나눔이 바로 이웃을 살리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시 나눔을 실천하는 이  사랑의 확산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의 정신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곳을 다니시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이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나라란 바로 인간의 이해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이 이 지배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찾아올 수 없는 사람은 찾아가시고 찾아올 수 있는 사람에게는 찾아오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목여정의 정신을 보게됩니다. 사랑과 믿음과 순명과 겸손의 정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정신이 구현되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에 코린토 교회에서는 일부 신자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15장의 주제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다루면서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코린 전 15, 17-18)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설교 할 때에 그들은 비웃었다(사도 17, 32)고 합니다. 코린토 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어도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응답으로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은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이 죽음을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가교로 여기며 오히려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기쁘게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기쁨의 중심에 바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이 있기에 지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참 행복을 느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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