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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8-10 15:57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마태 18,21─19,1) -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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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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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48

2016년 8월 11일 목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 33)


오늘은 클라라 성녀 기념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클라라 성녀에 대해서 굿뉴스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귀족인 오프레두치오와 오르톨라나디 피우미의 딸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Clara)는 용모도 뛰어나서 12세 때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들의 강권을 물리쳤으며, 1212년 사순절 때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성지 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자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바스티아 근방 성 바오로(Paulus)라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녀가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산 안젤로 디판초로 옮겼는데 그 얼마 후에 15세 된 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12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생활양식을 써줌으로써 가난한 부인회가 탄생된 것이다. 이 회가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클라라회이다. 클라라는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얻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애긍에 의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클라라는 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였고,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클라라회의 수녀들은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하였다. 그러나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였지만 늘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클라라회는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보급되었고 교황과 추기경 및 주교들의 자문 역할로써 떨친 그녀의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는데, 1241년 그녀의 기도로 프레데릭 2세의 난폭한 군인들로부터 아시시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에 아시시에서 운명하였는데, 2년 후에 곧바로 시성되었다. 클라라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고 문장은 성체 현시대이다.

오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자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으로 저에게 다가오십니다.  

먼저 자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 때 당신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나도 저의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형식적으로 그냥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질을 말씀하십니다. 베풀어야 하니까 베푸는 형식적인 자비가 아닌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 이 복음의 앞 부분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공동체의 하나된 마음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나를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단순히 스승이나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과 권위를 지니신 분께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명확하게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혹은 얼마만큼? 몇번이나? 등등의 구체적인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담긴 뜻을 살펴봅니다. ‘일곱 번을 용서해 주면 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는 성경에서 일곱의 의미는 ‘완전함’과 ‘꽉 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께서도 일곱 번까지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일 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곱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다릅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 속에는 동시에 용서의 횟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17장 3절에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하고 말합니다. 회개가 전제가 될 때 용서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회개’에 대한 조건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이 회개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것과 우리의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아들여 구원을 받거나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멸망하거나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고, 용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정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 용서의 태도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보면, ‘용서’란 바로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지워서  없애 주고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은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함이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냥 말로써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위헤서 언급한 자비의 질처럼 횟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우고 잊는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의 기준은 바로 우리의 행동 그대로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에 말씀하신 황금률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하느님께서 자 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만 자비를 베풀 수도 있고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체험하는 하루,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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