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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1 04:17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에 (마태 10, 7-13) -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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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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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96

2016년 6월 11일 토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에 (마태 10, 7-13)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 7-8)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의 축일입니다. 먼저 바르나바 사도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계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에 대해서 굿뉴스 성인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알려줍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극찬을 받은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원래 키프로스(Cyprus) 태생으로 요셉(Josephus)이라 하였는데,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오로(Paulus, 6월 29일)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했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동체를 둘러보기도 하였다(사도 11,22 이하). 그리고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로부터 그곳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오로와 함께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세 사람이 키프로스와 페르게 그리고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선교여행 길에 올랐을 때,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리카오니아 지방의 이코니온과 리스트라로 갔으며, 여기서 그들은 신들로 인정받았으나 곧 돌 세례를 받게 되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 

유대인 예식 준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 보고를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다른 방문 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팜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로 바오로가 요한 마르코를 반대하자 그들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바오로와는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성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Roma)에서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위경인 바르나바의 편지가 그에게 헌정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70년과 100년 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듯하고, 바르나바의 행전은 요한 마르코의 업적일 것이다.”(굿뉴스 성인편에서)

오늘 아침에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함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웃에게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아무런 조건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갔던 사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면서 악인은 성공을 하고 출세의 가도를 가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억울한 삶도 전체의 우리의 삶을 두고 보면 그렇지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인의 삶을 되돌아 봐도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그 순간만을 보면,  하느님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에서 부분을 보면,  그러한 순간들도 하느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기까지 그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의 영역에서는 벗어나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극도의 고통으로 내 몬 형들이  그들의  행동 때문에 요셉 앞에서 복수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하고 말을 합니다. 형들의 행동이 하느님의 구원의 큰 그림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7-8)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주님의 기도는 7가지의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청원’ 입니다. 하늘나라가 오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일하고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늘나라는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가시적인 표지가 바로 ‘앓는 이들을 고쳐주는 일이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는 일,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슴을 선포하는 일’이 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4, 17)도  그리고 세례자 요한도(3, 2)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슴을 이미 선포하셨고 여기서 다시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차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당신의 사도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행함에 있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능력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도구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행동을 보게 됩니다. 주인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도구들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주인이 차지해야 하는 영광도 가르채는 도구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의 일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도 일어나고 있슴을 보게 됩니다.  유혹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여행 보따리고 여벌 옷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세상적인 방법이나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어떠한 수단도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기서 ‘지팡이’는 여행을 하다가 맹수나 도둑이나 강도들을 만났을 때 호신용으로 사용했던 도구인데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평화의 사도’로서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을 의미합니다.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우리가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면 그외의 것들을 곁들여서 받게 된다(마태 6, 33)고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사도의 조건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과 함께 시작된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종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 나는 자유하지만 세상이나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면 결국에는 나와 세상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참 자유와 노예의 삶은 내가 어떠한 삶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러하기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죽음도 명예도 권력도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기에 어떠한 세상적인 것도 바오로 사도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은 이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5, 7-8)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나의 이웃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나를 통해서 나의 이웃이 참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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