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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14 22:29
   성지순례 셋째날: 프라하에서의 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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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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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셋째날: 프라하에서의 둘째날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푹 잠을 잤다고 생각하고 깨어보니 새벽 1시 밖에 되지 않았었습니다. 미국과 이곳과의 시간차가 영향을 미치고 있나 봅니다. 이왕 일어나서 다시 잠자리에 들기도 그렇고 하여 성서를 읽다가 또 기도를 하다가 시간을 보내다 보니 2시간 정도가 지났습니다. 졸려서 다시 잠을 청했다가 일어나 보니 7시였습니다.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 갔습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식당에는 이번 그룹에서 제일 연세가 많은신 박 프란체스코 형제님께서 벌써 내려 오셔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거의 끝내시는 중이라 혼자서 새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율리아노 형제님과 아네스가 내려 왔습니다. 이번 그룹에서 두번째로 나이가 어린 아네스는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이번에 아버지를 도와서 함께 왔습니다.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입니다. 이번에 함께하신 연로하신 분들의 손과 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파크 호텔은 기대이상으로 모든 시설들이 깨끗하고 현대화 되어 있었습니다. 율리아노 형제님에 의하면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삼개월 전에 리모델링을 해가지고 이렇게 되었답니다. 식당 역시 깨끗하고 부페식으로 하는 아침식사의 음식들은 참으로 질과 양에 있어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일행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식사 후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로비로 내려갔습니다. 이미 다들 모여 있었습니다. 율리아노 형제님의 기분이 좋지 않게 보였었는데 아니나 달라, 순례단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호텔직원들에 기분이 상하셔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총지배인에게 항의를 할려고 하였으나 일단 총지배인이 없어서 항의는 오늘 순례 후로 연기가 되었습니다. 어쨌던 이러한 일들이 오늘의 순례여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습니다. 

어쨌던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밤 폭설로 오늘 새벽 0시부터 공황이 폐쇄 되었다고 어제부터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현지 안내인이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폭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으며 길가의 모든 차들이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라하를 일반적으로 ‘건축 박물관’ 혹은 ‘백탑의 도시’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시내에는 로마네스코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 등의 약 천년에 걸쳐서 발전되어온 건축 양식들이 전쟁 중에도 전혀 파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자신들의 독특한 미를 간직한 채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눈이 와서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끄러운 얼음 길을 도보로 순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코스를 그대로 따라 갔습니다. 먼저, 프라하 성(Prague Castle: Hradcany)에 있는 왕궁(현 대통령 궁)과 세계에서 6번째로 크다는 성 비투스성당( Vytus Cathedral )과 그 주위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하얀 쌍탑의 성 이르지(St. George) 성당을 살펴보고, 황금소로에 있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의 피곤을 달랬습니다. 이 황금 소로는 카프카가 아버지 몰래 누이동생 집에 숨어서 집필한  22번지의 작은집과 원래 중세 때 황제의 명에 의해 연금술사들이 철로 황금을 만들려고 수많은 실험을 하던 장인들의 거리로 유명하였습니다. 비록 금을 만드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 덕분에 화학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지역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라하의 성은 블타바 강의 왼쪽 약간 높은 흐라드차니 언덕에 위치해 있는 성인데 , 이 성의 역사는 9세기의 교회,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 건축되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현재의 프라하 성은 14세기 카를 4세가 고딕양식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성의 일부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가준에에 중정이 있고, 오른 쪽으로 성 십자가 교회가 있으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 비토 교회가 있습니다. 이 성 비토 교회는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이루어진 교회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당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보다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인들이나 일반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문화적인 유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이나라 국민의 40퍼센트가 가톨릭이지만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가운데 9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배경에는 종교개혁보다 백년이나 앞서서 있었던 쟌 후스의 종교개혁과 민족주의가 아주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프라하에서 우리가 순례의 목적으로 삶고 있었던 곳은 바로 ‘아기 예수님’이 모셔진 성당입니다. 갈멜 수도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Church of Our Lady Victorious를 방문했습니다. 미리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일단 이 지역 안내자로부터 간단하게 이 성당의 역사와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성당의 제대 위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성체시간에는 우리 순례단 뿐만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고 있는 분들도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미사를 끝내면서 순례단 모두는 안수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이곳의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아기예수님에 대한 존경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거의 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습니다. 성 아타나시오와 예로니모 성인을 비롯한 교부들과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 수도회 개혁의 핵심 인물이신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에 이어 현재에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특히 데레사 성녀는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시는 동안 아기 예수님의 조각상을 항상 휴대하고 여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특별하였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님에 대한 개별적인 묘사들은 14세기에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각상은 대표적인 이미지가 수녀원의 수녀님들이 기도 중의 환시를 통해서 보여졌던 독일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기 예수님은 그의 양손에 여러가지의 대상들을 쥐고 있습니다. 대개 오른 손으로는 축복을 하고 왼손으로는 성체성사와 연관되는 새, 사과, 책, 십자가 혹은 포도가지 등을 들고 있습니다. 중세때는 아기예수님 상들이 나무로 만들어 졌으나 바로크 시기에는 왁스나 아이보리나 동과 다른 재료들로 만들어졌다. 바로크 시기의 작업장에서는 예수님의 조각 상에 옷을 입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에 대한 숭배는 바로크 시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역사는 스페인에서 시작합니다. 이 아기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이름모를 예술가의 작품입니다. 그것은 Cordoba와 Seville 사이의 어떤 수도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Dona Isabela Manrique de Lara a Mendozar가 아기 예수님을 소유했습니다. 그로부터 아기예수님은 그녀의 딸인 Maria Manrique de Lara에게 결혼선물로써 주어졌고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서 결국에는 프라하의 Mala Strana에 있는 Virgin Mary Victorious 교회 근처에 있는 Teresian Carmelites의 수도원으로 오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의 상은 수도원의 수련자들이 주로 기도하던 채플에 놓여졌습니다.  1631년에 색슨족이 프라하를 침범하였습니다. 이들의 약탈행위는  수도원이라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상은 높은 제대 뒤로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졌습니다. Cyril a Matre Dei 신부님이 뮌헨으로부터 버려진 성당으로 되돌아 와서 파괴돤 예수님 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번의 헛수고를 하고 난 후에 팔들이 부서진 아기 예수님의 상을 보수하는데 필요한 돈을 프라하 시민들로부터 모금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기 예수님은 다시 한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기적들과 스웨덴으로부터 프라하의 보호가 아기예수님의 상과 관련지어 졌습니다. 1651년에 Martinic 가족들은 아기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굉장히 깊었습니다. 이들의 지도하에 예수님 상은 Our Lady Victorious 교회에서 부터 프라하에 있는 모든 교회로 행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축제에서 아기 예수님 상은 Gratious라는 이름을 받게됩니다. 1655년에 프라하의 주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께 Bernard Ignac of Martinic에 의해서 명령된 왕관을 씌워드립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미사가 매년 예수님 승천 대축일에 봉헌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아기 예수님은 Holy Rood의 채플에 놓여졌는데 1741년에 수 많은 순례객 때문에 성 요아킴과 안나의 옆 제대로 옮겨졌습니다. 19세기에 아기 예수님 상을 통한 기적들의 명성이 스페인어를 쓰는 남아메리카와 이탈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곳들 뿐만 아니라 몇몇 수도원들에서는 특별히 전례적으로 제작된 기도를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께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필리핀, 중국 혹은 베트남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도 아기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의 근원에 대한 전설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스페인 남부의 어느 갈멜 수도원에 4명의 수도자들이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특별히 깊은 요셉이라는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린아이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와 함께 기도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수사는 성모송을 외우면서 “태중의 아들 예수’라고 외울때, 그 아이는 자신이 바로 그 아이라고 말하고 사라졌답니다. 하지만 수사님은 그의 얼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그 아이를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기를, 단지 순간적으로라도 볼 수 있기를 열심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동일한 것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수년 동안 시도를 했으나 어느날 아기 예수님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초상화를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이미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 아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가 나와 동일한 모습을 한 조각상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자신을 너에게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하고 말했습니다. 수사님은 즉시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수사님을 아기 옛수님의 얼굴을 완성했습니다. 수사님께서 그 작업을 끝냈을 때 그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수사님은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리고 잠들었는데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수사님의 어린 친구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이 전설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많은 느낌을 주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과 아빌라의 대 데레사 수녀님과의 만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수녀님께서 어느날 수녀원의 계단을 올라 가시는데 어린아이가 나타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저는 아기예수의 데레사 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 아이가 자신이 바로 그 아이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순례를 시작했기에 성 아래로 내려와 카를교를 지날 때는 순례단의 대부분은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카를 다리를 건너서 우리가 예약을 해 놓은 식당이 있기에 어째던 이 다리는 건너야 했습니다.

 이 다리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다리 한 가운데 있는 난간에 십자가의 플레이트가 묻혀 있는데 , 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열을 지어서 소원을 빌기위해 서 있었습니다. 

다리의 길이는 520미터이며 넓이는 10미터로서 자동차의 통행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 다리는 1357년 카를 4세 때 당시의 건축가인 팔레지가 손수 건축한 것입니다. 다리의 양쪽 난간에 성성에서 제재를 취해 만들어진 성상이 15채씩 모두 30채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약 200년의 시간이 걸려 현재와 같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여름이면 카를 다리의 성상 밑에서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 엑세서리나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고서 팔고 있으며, 난간 위에서 독서나 낮잠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관광객도 훨씬 줄어들고 시민들이 하얗게 눈으로 덮인 성상들 사이를 두터운 옷을 여미며 발길을 서둘러 지나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그 모습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들 다리를 꽉채우며 지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데 군데 그림을 그리는 젊은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관광객의 숫자가 증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서 구시청사로 향하는 길에 있는 조그마한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 예약을 해 놓았습니다. 아담하게 작은 식당은 우리 순례단의 규모에는 적당하였습니다. 이제 열 살이 겨우 넘은 우리의 귀염둥이 안드레아가 본인 옆에 앉았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짜증 부리거나 귀찮게 함이 없이 참으로 잘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아주 외교적으로 대답하는 재치있는 아이입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체코의 음식은 그렇게 우리의 입에 맞지 않는  그런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스프와 우리가 잘 먹는 돈까스와 같은 형식의 본식과 야채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구시가’라고 부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구시청사 광장 주변에는 아케이드가 딸린 르네상스 양식의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 보존을 위해서 전차의 노선을 폐지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광장은 프라하 시민의 휴식처로서 후스의 상을 중심으로  빙 둘러 놓여 있는 벤치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광장에는 15세기 카를 대학 수학교수 하스주가 만들었다는 천문시계가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서 다른 도시와 나라에서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이 시계를 독점하고 싶은 프라하의 시청에서 하스주 교수가 이 시계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도록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슬퍼한 이 교수는 다시 한번 자신의 걸작을 만져 보기 위해 시계탑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계에 손을 대자마자 시계는 그대로 멈추어 400년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시계는 그후 1860년대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다시 울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프라하는 예술의 도시로 유명하기에 우리 순례단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페라를 관람하기로 하였습니다. 현지 안내인과 율리아노 형제가 표를 구입하러 간 사이에 둘러보니 최 세실리아 자매님과 아네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구 시가지에서 자유시간을 갖는 대신에 호텔로 돌아가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식사를 하러 가자고 결정하고서 보니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래 저래 고민을 하던 중에 로베르트 형제님께서 광장을 둘어보고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광장의 중앙으로 가셔서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들 역시 우리를 찾아서 많은 걱정을 하고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서로가 찾는다고 낭비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호텔로 돌아와서 잠시 쉬었다가 어제 저녁을 먹었던 한국식당으로 다시 갔습니다. 식당의 안벽에는 이곳을 다녀간 관광객들이 자신이 다녀갔다고 남긴 흔적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던지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인의 씁쓸한 버릇입니다. 어쨌던 이 식당의 주인은 식당의 안벽을 관광객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을 수 있도록 오히려 개방해 놓은 것이 일종의 좋은 아이디어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순례단의 막내 안드레아도 자신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흔적을 영어로 남겼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는 오페라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본인도 실상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술의 도시인 이곳에서 오페라를 생애 처음으로 관람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함께 했습니다. 러시아어로 공연하고 전광판에 체코어로 번역을 해주는 오페라였습니다. 영어나 이태리어로 해도 알아듣기 힘든 것인데 그리고 사전지식도 하나도 없이 오페라를 관람한다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벌써 졸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본인에게로 집중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본인의 코고는 소리를 동반한 졸음에 더이상 주변의 사람들을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율리아노 형제님께서 밖으로 나가자고 해서 극장 로비에서 끝날 때까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프라하에서의 둘째날이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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