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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강론및기고 >  매일말씀묵상
 
작성일 : 13-10-20 13:35
   성지순례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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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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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기-10

 

그는 이 두 권의 책을 일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헛된 명예와 영달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의 자신의 삶이 너무나 헛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자신의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 불타 올라 그분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성실한 봉사자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로욜라 성을 떠나서 몽세라트에 오게 됩니다. 이 곳의 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중, 그는 몇 일 간에 걸쳐서 총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지난 날의 삶과 절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522 3 24일 밤중에, 그는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주고 그토록 자신이 입고 싶어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자신의 검과 단도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 하였읍니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이제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이냐시오는 몽세라트를 떠나 만레사에서 머물면서, 까르도넬 강가가 굽어보이는 동굴 안에서 기도와 극기로 1523 2월까지 1년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 곳에서 그는 고행과 문전 걸식을 하며 가시 돋힌 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체험해 갔읍니다그러는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병사로서 용감한 무사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성숙해갔읍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의 스승이 되시어 사랑하는 제자를 한걸음 한걸음 이끌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은 물론 밤중에 일어나고 단식도 하며 또 자신에게 엄한 고행의 채찍질을 해가면서 영신을 수련하였고, 묵상 중에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배워가며 쓸쓸함과 흐뭇함, 그리고 슬픔과 기쁨, 또는 불안과 평화 등을 번갈아서 깊이 체험하였읍니다.

마침내 그는, 로욜라 성에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리고 몬세라트와 만레사에서 수련하고 투쟁하는 동안, 내면적으로 겪은 깊은 체험을 통해서 먼저 자신을 위하고, 그리고 또 열렬히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을 위하여 만레사에서 영신수련의 기본원리와 요점을 기술하였읍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도적 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불타 올랐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작은 도시 만레사를 떠나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의 사도직(司徒職)의 본질적 요소로 삼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이 33살 때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운 후, 알칼라 대학에서 힘든 과목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읍니다.

이 공부기간 동안에도 그는 만레사에서 체험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데 헌신했읍니다. 또한 1526년 대림시기부터 1527 6월까지 키메네스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이를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읍니다. 1527 6월 그는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읍니다. 거기서 성인은 아주 열렬한 복음주의자였던 까닭에 종교 심문관은 그의 생활방법과 설교, 신학을 문제삼아, 여러번 그를 투옥하고 심문하였읍니다. 살라망카에서도 그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금지되어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1528 2월 파리로 갔습니다. 성인은 42세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533 3 13일 문학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그 당시 그는 파브로, 사비에르, 살메론, 라이네스, 보바딜랴, 로드리게스, 재이, 브로잇, 코르르들과 친분을 갖게 되어 그들을 영신수련을 통해 지도했었읍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이며,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고, 우리가 세상의 사도로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기도와 사도직의 지침서인 '영신수련'으로부터,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예수회의 사도직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1534년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가난, 정결의 첫 허원을 합니다. 그리고1535 4월 그는 대학공부를 끝내고 파리를 떠나 1537 46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읍니다.

1537년 그가 파브로와 라이네즈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영시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수도회를 '예수의 동반자' (Companians of Jesus)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1539 3, 이냐시오와 그의 동반자들은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고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예수회 첫 회헌을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6 9 27일 인가를 받았읍니다. 이냐시오는 교황님 명령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순명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1541 4 8일 예수회의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냐시오가 돌아가실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어 갔읍니다.

몬세라트를 거쳐서 만레사로 향하는 버스의 뒤창문을 통해서 펼쳐지는 바위산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만레사에 도착해서 카르도넬강과 이냐시오 성인이 계셨던 동굴을 살펴 보았습니다. 수사신부님들과 그곳에 근무하시는 자매님들의 친절함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수회에 대한 소개 필름을 본 후 순례단은 바르셀로나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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