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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30 08:08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축일에( 요한 15, 12-17) -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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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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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59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축일에( 요한 15, 12-17)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2)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모든 가타리나 자매님들께 축하를 드립니다. 매일 미사 책을 보면 성녀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때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매일미사 2016년 4월 29일)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의 모습입니다. 이 새로운 계명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순명에 기인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순명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해야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순명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인 예수님과의 밀접한 결합과 이러한 사랑의 결합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의 체험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말은 10절에서 하신 “내 계명”이라는 말씀의 설명일 뿐만 아니라 13장34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신 말씀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요한 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과 필립피서 2장에 6-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순명에 관한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 6-8)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활동의 핵심은 바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는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게하시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을 남을 위해서 죽게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추는 비움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비움과 겸손 그리고 순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슴을 보게 됩니다. 

요즈음 많은 부부들이 갈라섭니다. 그런데 그 갈라섬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 문제들 때문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이유 때문에 갈라서는 것입니다. 잘 들어주지 않는 것. 상대를 무시하는 말투등등 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사회는 그와 반대의 삶이 대세임을 보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위주의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랑도 자기위주로 합니다. 그  한 예를 봅니다.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생각나는 어느 가장의 가슴 아픈 독백입니다. 

“저는 가족을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도 안 돌보고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이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대들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해 준 게 뭐가 있어요?’ 덩달아 제 아내도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이제 지긋지 긋해!’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욱하는 성격에 한바탕 싸움을 하고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야! 공부나 잘해!’ 그리고 제 아내에게 해 준 말은 ‘밥 줘! 나 피곤해! 당신이 알아서 해!’ 이 세 가지 말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부부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당연히 상대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그 착각이 바로 이 가정을 깨어놓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고전 13:4-7)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모든 가타리나 자매님들께 축하를 드리고 가타리나 성녕의 삶이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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