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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6 07:26
   부활 성야 미사 강론(루카 24, 1-12) -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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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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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30

2016년 3월 26일 성토요일 

부활 성야 미사 강론(루카 24, 1-1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  5)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길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분이 이길을 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리고 이 고난의 길을 가셨던 것도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의 소통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입장 만을 일방적으로 강조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변하지 않으면 자신보다는 상대를 탓합니다. 가장 좋은 소통의 방법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께서 인간이 되시면서 소통의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상에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이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부활의 뒷면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뒷면은 어둠과 죽음입니다. 영원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희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절망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  5) 하고 질문하십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저에게 이제는 세상을 지배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배를 벗어나야만 하느님이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이자 인생의 마지막을 정신장애아들과 함께 살았던 헨리 나우웬이 ‘죽음’에 대한 묵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노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내가 살아온 햇수만큼 또 살 수 있는지 곧잘 계산하곤 했다.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또 한 번의 스무해를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서른이 되었을 때에도, 예순까지는 무난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마흔이 되자 여든까지 살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쉰이 넘었을 때는 백살까지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순이 된 지금, 나는 내가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아주 멀리 와 있으며, 내가 태어난 때보다는 죽을 때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는 예순이 넘어서 이 글을 썼고 예순 다섯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온 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으로 갈 때는 언제 갈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온 순서대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좀 더 삶을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움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아픔과 슬픔이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당연히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고통을 압도하기에 고통이 고통이 아닌 것으로 다가옵니다. 또 사랑 때문에 받게 되는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생각하기에 고통은 사라지고 사랑 만이 남습니다. 그 사랑이 영광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나는 영광이고 바쳐지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빛으로 다가옵니다. 어둠을 이기고 다가오는 빛은 새로운 모습입니다. 그냥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빛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사도 2, 32)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참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분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다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는 인간에게, 죄와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둥되는 인간들에게  ‘평안하냐’ 하시며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미션이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시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 분이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시고 이제는 우리에게 평화의 전도사로 오십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서 살지 않도록 초대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평화’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두려움도 이러한 평화를 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 모르스 웨어라고 하는 분이 “If I should die befor I live” 라는 책에서 부활절에 대해서. 네 개의 문장 형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부활절은 쉼표다. 모든 일을 쉬게 한다. 둘째, 부활절은 마침표다.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끝내 버리는 거다. 마침표다. 부활절은 의문표다. 끝까지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은 느낌표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여러분들께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참으로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속에서 이제 세상을 넘어 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과 긴장에서 이제는 주님과 함께 참 평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삶에서 이제는 참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인간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비해 놓은 글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이는 일을 한다면 

하느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미움의 일을 한다면

하느님은 사랑의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사람을 끌어내리는 일을 한다면

하느님은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 사람을 좌절하게 한다면

하느님은 소망을 주고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부활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글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여러분 모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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