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09
2016년 3월 2일 수요일
계명을 지키고 사는 삶 (마태 5, 17-19)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있슴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히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능동적으로 하는 사람과 수동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에 대한 바라봄의 기준이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희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1절을 보면,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1절) 하고 말해 줍니다.
믿음은 내가 바라고 기대하고 꿈꾸는 것들에 대한 보증이라고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내가 원하고 꿈꾸는 것들이 믿음이 없으면 어렴풋하게 보이고 확신이 없지만 믿음을 갖게 되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일들이 명확해 지고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 이라고 합니다. 보지 않는 실체들인데 어떻게 증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증거가 내 마음에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바로 희미한 것을 명확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마음 속에 실제로 존재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러한 체험이 없으시다면 왜 하고 이유를 물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똑 같은 것을 보면서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끼는 경우를 체험합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역시 다를 때를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느끼지 못합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당시에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 편에 서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 54)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것이 아니고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을 상상하는데 서 계시다는 것이 생소하게 들립니다. 언제나 스테파노의 영혼을 받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부를 때는 더욱 가까이 계셔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많은 위로가 됩니다. 이성으로 따지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이해하게 되고 위안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근본은 없어지고 껍질만 남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본질을 회복시키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사랑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 이 세상에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은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인간에게 죽음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보게합니다. 한계에서 영원으로 넘어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넘어서는 우리의 삶이 바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고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주님을 불러봅니다. 가슴이 뜨거워 옵니다.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이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자유하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