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07
2016년 2월 29일 월요일
한계를 영원으로 바꾸는 삶(루카 4, 24- 30)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인생은 참으로 강물과 같이 흘러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이 시간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시간이지만 그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할 것입니다. 참회의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이 시간을 나는 어떠한 속도록 지내고 있는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계 속에서 영원을 사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에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보고 답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갑자기 멍하니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여전히 나의 삶의 주인은 나이구나 하는 반성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오로지 당신 만을 찾고 당신께만 의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자신의 힘으로 이겨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존재의 가치는 나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존재케하신 분의 뜻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인 삶의 가치와 하느님이 주인이신 자신의 존재의 가치는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삶은 영원한 삶과 행복과 자유를 보장하지만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은 바로 죽음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고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떠나갑니다. 익숙한 장소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좀 더 나은 삶의 행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왔다가 떠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만남과 이별이 잦은 곳입니다.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어느 순간에 두 감정이 하나의 감정으로 바뀌어감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기쁨으로 어떤 때는 슬픔으로 하나되어 갑니다.
시간은 기쁨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슬픔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가 결단하게 합니다. 이 시간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기쁨의 삶을 시간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슬픔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 함은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내어 놓는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루카 4, 24)에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갖고 오랜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슬픈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아는 곳이기에 현재의 나보다는 과거의 나를 덧씌워서 현재의 나를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에 고정된 시각은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고향을 찾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현재가 과거를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찾는 고향에는 더 이상 어머니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서 과거의 고향을 찾지 말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제는 현재에서 과거의 어머니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누구도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현재에서 과거의 어머니를 찾지말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고향은 나의 과거만을 기억하지만 현재의 나는 나의 과거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결단해야 하는 것은 과거만을 기억하는 나의 고향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과거가 주는 아픔을 안고서도 현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향은 나를 환영하지 않아도 나는 고향을 환영하면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곱번이나 요르단 강에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아만은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너무나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순간의 교만을 딛고서 일어나 순명합니다. 왜 한번이 아니고 일곱번이었을까요? 과거의 나를 완벽하게 씻는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겉으로는 쉬운 일이 사실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보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과거는 나의 겉만 보았지만 현재는 나의 겉을 나의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나의 겉만 보는 과거를 두고서 현재의 나를 환영하지 못한다고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는 정지한 과거에게 생명을 주는 과거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을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러한 지혜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일 곱번을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기대하던 고향이 아닌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고향, 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지혜로 하루를 시작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