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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17 05:40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17-28) -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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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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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97

2016년 2월 17일 수요일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17-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6-28)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시지 않은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예외없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주신 본능을 좇아 큰 변화와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은 그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을 통하여 결정됩니다. 다시말해서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예수님은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를 먼저 챙깁니다. 동시에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악한목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양들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착한목자는 자신의 양들이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소유물을 지배하는 소유가 아닌 소유의 노예가 되는 소유를 합니다.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참으로 가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소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당신께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빵의 기적처럼 빵 2개와 물고기 5마리로 오천명을 살리기도 하고 오천명을 먹일 양식으로 자신이 독차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두고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십니다. 죄를 지을 자유까지 허락하신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나 봅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당시의 종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과는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인의 의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의 개념을 알고 있는 바오로 사도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이 되면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자유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더 사랑하면 이들의 노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언론은 밝음보다는 어둠을 먼저 보도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둠이 꽉찬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소리없이 자신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분들의 삶이 이 세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옳음을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소리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비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원래의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주인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으면 그것에 만족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 계약을 넘어서 나의 이웃이 어떠한 계약으로 얼마나 받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비교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어 감을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옴을 봅니다. 자

주변의 많은 분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하고 소개합니다.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을 두고 판단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도 오래된 햇수만큼에 상응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오랜기간의 믿음의 생활이 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오래된 것이 자신보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못해신앙으로 변질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받고 못받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그만큼 축복의 생활이 늦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도와 주는 것이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고 신앙생활은 오래하면 할수록 겸손의 덕이 쌓여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보수를 주더라도 만족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목자가 아닌 섬기는 목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삼의 참 모습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정의 했듯이 주님의 종의 삶을 시작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입니다.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만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만을 신뢰한다는 다짐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질문의 참 뜻을 묵상하는 하루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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