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593
2016년 2월 12일 금요일
단식의 참된 의미(마태 9, 14-15)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오늘 제1독서는 참 단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음식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한 세상을 질서잡힌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참 단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단식은구체적으로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외부의 작용에 의한 결박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스스로에게 지워 놓은 결박을 푸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억압 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역시 출발점의 나 자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 이웃이 되어 주는 삶입니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참 단식의 의 미를 깨닫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 전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삶에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마태 9, 13)’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는 열과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을 찾아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삶의 양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참 뜻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 광야에서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자들도 극기와 단식의 생활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자 요한이 일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 29) 하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친구로 묘사했었는데 이를 인용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와 같은 기쁜 곳에와서 단식을 하는 것은 기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더라도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더라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단식을 하더라도 표시가 나지 않도록 화장을 하라고 하시는 그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있고 싫어하시는 단식이 있다고 합니다. 이 단식은 일종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의 표시를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는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겉이 화려한 사랑의 표시가 아닌 소박한 사랑이라도 내실이 있는 사랑의 실천의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 내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사랑의 모습이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양식을 굶주린 이들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분의 양식을 나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양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평소보다 덜 먹고 나누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련하게 떠도는 사람을 집에 맞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이해득실을 따져서 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불쌍하게 떠도는 사람 즉 오히려 나의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나의 것을 벗어서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불쌍한 혈육을 보고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의 모습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에서 4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회적인 약자에게 잘 해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득실을 따져서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이기에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진실한 사랑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신만 생각하게 되면 이웃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낼려고 하는 사람은 이웃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이렇게 이웃을 배려하는 삶, 약자를 보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살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삶이 바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옛 생각과 삶의 양식을 고집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멀리할려는 것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두려워 하는가?’ 질문합니다. 제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하루이기를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