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87
2016년 2월 5일 금요일
파멸로 이끌어가는 교만 (마르 6, 14-29)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 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마르 6, 18-19)
오늘은 아가타 성녀의 축일입니다. 성녀를 추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모든 분들께 축하를 드립니다.
오늘축일을 지내는 아가타 성녀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주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아가셨던 분이십니다. 그녀는 로마황제 데치우스(249-251년)가 일으킨 교회박해 때 순교한 동정 순교자 입니다. ‘아가타’라는 이름은 ‘착하고 어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가타 성녀께서는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결국 당신께 청혼해서 거절당한 당시의 집정관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고서 체포했을 때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님, 모든 이의 주님이신 분!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당신은 저의 간절한 열망을 아십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가지소서.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제가 악을 이기도록 하여 주소서” 하고 바친 기도와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바쳤던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십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인간의 욕정의 충족이나 세상적인 목적의 성취에서 찾는 행복은 항상 불완전한 행복입니다. 상대적인 비교 우위에 의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행복의 척도가 되어 버리고 돈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천년 전에 희브리서에서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희브 13, 5-6)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세 인물을 보게 됩니다. 헤로데와 그의 부인인 헤로디아 그리고 딸 살로메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서에서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유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인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높아지자 헤로데는 이러한 인기가 반란이나 폭동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해서 요한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서에는 요한이 헤로데의 결혼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내용이었습니다. 어쨌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이러한 행위의 부당함을 여러차레 지적하였기 때문에 헤데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슴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행위에 대해서 당사자인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여러차례 세례자 요한을 죽일려고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날에 지역의 유지들과 고위관리들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엽니다. 이 축하 파티 장소에서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딸 살로메는 춤을 춥니다. 당시에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런 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춤은 매우 음란한 춤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살로메의 나이는 14-15세 정도 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헤로데는 공주의 춤에 빠져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자신의 권한 밖에 있는 것까지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갖다 달라고 청합니다. 당시에 왕의 잔치 때에는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살로메기 이러한 춤을 출 수 있었고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갖다 달라고 하는 청은 자신의 어머니인 헤로디아와의 사전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협력하여 자신들의 부당함을 덮기 위하여 무고한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죄를 짓고 난 뒤에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자신의 부하를 죽이는 다윗의 모습이 함께 지나갑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에덴 동산 안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이들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 결과는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이 죄는 부끄러움을 알게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이 탐했던 여인의 남편을 죽게 만듭니다. 그 이후에 참으로 처절하게 회개하는 다윗의 모습을 시편 51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삶의 논리로 살아가는 예수님을 그들은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부당성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합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죽게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은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목자의 위기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지 살아가지 못하고 신앙의 위기를 갖게 되는 이유는 결국은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