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85
2015년 2월 3일 수요일
과거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현재(마르 6,1-6)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사무 하 24, 17)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 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 4)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눈에 끼어있던 무명의 백태가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는 구상시인의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참으로 애절하게 용서를 청합니다. 한 순간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다윗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면서도 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데는 참으로 인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색한 삶이 우리의 시각을 고정시켜 버립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나 봅니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어느지역과 어느학교 출신인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언론도 이 사람들의 출신과 교육의 배경에 대해서 경쟁적으로 보도합니다. 지역마다 유명한 사람이 나오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큰 플래카드를 걸고서 그 사람의 출신학교나 지역의 우수성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아침에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을 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참된 의미는 어느누구나 자신이 어린시절 일정기간을 자라온 지역의 사람들로부터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살았던 어린시절의 일정기간을 지내면서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 기간 이후로 어떤 사람의 변화된 모습에 기초해서 평가를 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함께했던 그 정지된 시간동안 그 사람의 모습을 갖고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서 선입견을 갖고서 사람을 평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은 선입견에 의한 인간의 판단 기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 가에 대해서 깨우침을 줍니다.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주교님께서 이제 일련의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부제품을 앞둔 신학생들에게 사목실습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면접을 하게 되었답니다. 우연히 어떤 신학생에게는 자신의 출신 본당에서 사목실습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신학생은 성경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실습지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에 주교님께서는 이 신학생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그 본당의 신자분들은 자네와 예언자와는 혼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하고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예화가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너무도 자주 이 말을 인용하는 우리에게는 이 말씀의 인용에 대해서 좀 더 주의를 가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역으로 우리 모두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당당하게 지난 날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족하게 살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에 얽메여 사는 것보다는 다가오는 미래에 삶의 승부를 거는 현명한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비슷한 다짐은 지금까지도 여러 수십 번을 더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완전자 앞에선 유한한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유한자가 완전자가 될 수 없슴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다짐이 그 다짐대로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심이 실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동시에 비록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부족했던 부분의 보충을 미래의 새로운 시작의 기반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완전자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절망이나 좌절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렇게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겠으나 동시에 과거의 자신의 부족했던 모습 때문에 타인에게 현재의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갖고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도 해방되어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의 부끄러운 기억들이나 부족함들은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의 자양분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희브12,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