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81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삶(마르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 26-27)
이상적인 만남은 나를 죽이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의 희생을 요구하면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지옥을 체험하지만 나를 죽이고 상대를 살리는 만남은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하고 이러한 만남 안에서 접하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합니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너는 비록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가 잠자는 동안에도 너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저를 하느님 앞에서 나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존재로 바뀌게 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교만이 아닌 겸손을 통해서 드러나는 감사가 지배하는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최근 들어서 기억력이 참으로 많이 쇠퇴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심함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면에서 예전보다는 세심함의 부족으로 실수를 합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데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이 들어감을 느끼면서도 실망을 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금의 나가 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빨리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했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감을 탓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가 없슴을 우리는 잘 압니다. 바닷 물에 빠지면 그냥 내 자신을 바닷 물에 내 맡겨야지 살려고 발버둥을 치면 오히려 물에 가라 앉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가고 있는데 이 가는 시간을 잡기 위해서 바둥대는 것은 바다에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시간의 바다 위에 내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있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빨리 높이 올라가는 등정주의를 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등로주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제는 일렬 종대로 가는 획일적인 삶이 아닌 자신의 길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 6-7) 하는 말씀을 통해서 위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저절도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손길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에게 보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노력이 합해질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서 바라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 세상에는 저절로 되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어우르져서 이루어진 것들임을 깨달으며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