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04
2015년 3월 10일 화요일
무한한 축복이 보장된 용서(마태 18, 21-35)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 33)
오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질문합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른 생각이 듭니다. 예수의 이러한 대답의 이면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면 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이 실천하는 우리에게 보상도 그렇게 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어쨌던 베드로가 용서의 횟수에 대해서 질문을 할때 이 질문을 통해서 이 복음의 앞 부분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절차로 해결해 하는 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단죄하는 것에 대한 신중할 것을 강조하셨는데 지금은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단순히 스승이나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과 권위를 지니신 분께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명확하게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혹은 얼마만큼? 몇번이나? 등등의 구체적인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담긴 뜻을 살펴봅니다. ‘일곱 번을 용서해 주면 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는 성경에서 일곱의 의미는 ‘완전함’과 ‘꽉 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께서도 일곱 번까지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일 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곱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다릅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17장 3절에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하고 말합니다. 회개가 전제가 될 때 용서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회개’에 대한 조건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이 회개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것과 우리의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아들여 구원을 받거나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멸망하거나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고, 용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정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 용서의 태도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보면, ‘용서’란 바로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지워서 없애 주고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은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함이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냥 말로써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위헤서 언급한 대로 완전히 지우고 잊는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의 기준은 바로 우리의 행동 그대로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에 말씀하신 황금률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측복도 일곱번의 일흔 배가 되어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체험하는 하루,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