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 메인홈 로그인 | 메일재인증 | 업데이트 알림 | 회원가입 | 관리자 문의 |  사이트맵 |  14 (회원 0)  
ApacheZone
등록된 배너가 없습니다.
등록된 배너가 없습니다.
Home >  강론및기고 >  매일말씀묵상
 
작성일 : 15-07-01 03:11
   이웃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삶(마태 8, 28-34) - 400
트랙백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924  
이글을 내twitter로 보냅니다 이글을 facebook으로 보냅니다 이글을 미투데이로 보냅니다 이글을 다음요즘으로 보냅니다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400

2015년 7월 1일 수요일

이웃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삶(마태 8, 28-34)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 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마태 8, 29)

우리 사회의 갈등은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심각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슴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의 소유의 개념을 넘어서 모든 분야에서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과 못 받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은 어디에서 유래할까를 고민하다가 오늘 제1 독서에서 그 단초를 발견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라 사이에 아이가 없다가 아브라함이 백살이 되고 사라가 90살이 되던 해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사악입니다. 참으로 이들에게는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사악이 젖을 뗄 정도의 나이가 됩니다. 이사악이 이복형인 이스마엘과 함께 놀게 됩니다. 질투의 화신이 사라를 부추깁니다. 사라는 이사악이 이스마엘과 함께 노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청합니다. 아브라함은 원치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청을 들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하람과 사라가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 이들을 쫓아내면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함에도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만을 줍니다. 부자의 인색함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쫓겨나는 것도 억울한데 이러한 인색함이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더욱 부추겼을 것입니다. 광야를 헤매면서 이들은  허기와 갈증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가르는 아이을 덤불 밑으로 던지고 저 멀리서 아이를 바라보고 앉아서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목 놓아 웁니다. 자신들을 제대로 배려해 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 우는 소리에 한탄과 원망 분노와 증오가 베여 있슴을 느낍니다.  사회적인 갈등의 출발점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지 못함에서 이러한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모든 갈등의 해소 방법은 바로 ‘들음’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바로 모든 갈등해소의 방법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소리를 먼저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소리를 먼저 들어주는 것이 중요함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살펴봅니다.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파하고 우는 자의 목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고 그 들음을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마귀는 자신들의 행위에 예수님께서 상관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도착한 '호수 건너편'은 '가다라인들의 지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방이 어디인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주석 성경에 의하면 ‘가다라인들의’ 대신에 ‘게르사인들의 ‘로  또 다른 수사본들에는 ‘게라사인들의 ‘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가다라는 갈릴레아 호수 남동쪽 10킬로미터 지점, 네카폴리스 지방에 자리잡은 그리스식 고을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이지방에서 마귀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왔다고 합니다. 

당시의 무덤은 자연동굴이나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었답니다. 따라서 피신처로도 이용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던 이 무덤은 부정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마귀들린 사람 둘이라고 마태오 복음은 전하지만 마르코 복음 5장 2절과 루카 복음 8장 27절에는 마귀들린 사람 한사람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무 사나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이들을 쫓아내어 마을에서 떨어진 무덤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 29) 하고 외칩니다. 여기서 마귀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4장 3절에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분명하게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악마는 벌서 알고 있었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에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과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자신들의 삶에 간섭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덧붙여서 아직까지 자신들이 쫓겨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저희들을 쫓아낼려고 하십니까” 하고 말합니다. 

악마의 본성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떨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창세기 때의 아담과 하와때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마귀는 자신들이 머물렀던 곳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았어도 이 공간을 성령으로 채우지 못하면 마귀는 무리를 지어서 다시 찾아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께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돼지 떼가 있는 그곳으로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왜 이들이 돼지 떼 속으로 보내달라고 했을까요? 교묘한 마귀의 전략입니다.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 위한 작전입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에 어쩌면 자신들 역시 부정한 존재임의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마귀들은 마귀들린 사람으로부터 나와서 돼지 떼속으로 갑니다.  돼지들은 마귀들이 들어오자 공포에 사로잡혀서 호수를 향해서 달려가 물 속에 빠져 죽어버립니다.  

돼지들이 왜 집단적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마귀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마귀들린 돼지들이 악령이 거주하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간것은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룩함을 피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곳으로 찾아가는 마귀의 모습을 봅니다. 결국 마귀는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 부정한 돼지에게로 그리고 돼지와 함께한 이들은 악령의 소굴인 물 속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그곳에서의 죽었다는 말은 악의 종말은 죽음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일을 체험한 그 마을의 주민들은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가 달라고 청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기 보다는 물질에 더욱 관심을 둡니다. 현상적으로 일어난 일에 이해득실을 따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신앙인들에게 영광인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떠나게 합니다.

하루 하루를 불안과 두려움 쌓여 살아갑니까?  아모스 예언자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이 삶은 바로  악이 아니라 선을 찾는 삶입니다.’ 하고 예언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삶의 결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마귀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감사가 넘쳐나고 기쁨이 넘치는 하루 하루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구체적으로 나의 이웃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글을 내twitter로 보냅니다 이글을 facebook으로 보냅니다 이글을 미투데이로 보냅니다 이글을 다음요즘으로 보냅니다  

 
   
 

굿뉴스 Diocese of Austin 마리아사랑넷
이용약관 |  개인보호정책 |  광고안내 |  온라인문의 |   로그인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Korean Catholic Church at Austin, Texas | 6523 Emerald Forest Drive, Austin, TX 78745 | Phone:(512) 326-3225
Copyright ⓒ www.kcc-austin.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