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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08 00:0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마르 7,1-13) -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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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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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90

2016년 2월 9일 화요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마르  7,1-1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언행일치의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하고 나니 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부끄럽습니다. 가능하면 언행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하지만 여전히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을 판단하는데는 참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 7)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7-8)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미는 이들은 하느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모든 하느님의 계명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바로 현대의 한국의 정치인들과 다를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금의 한국의 정치현실을 목도하면서 정치인들도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일텐데 한 사실을 두고서 가지는  그 양심이 극단적으로 다를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심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깨어있지 않으면 이들과 동일한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자유의지로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쓰러진 이후로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산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결단과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나의 의지적인 결단이나 생각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은 바로 생각이 결단이 그리고 단호한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매 순간 재현됨을 느낍니다. 하느님께서 하지말라고 명령하셨던 그 일이 지금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사탄의 유혹이 하느님의 초대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현실은 제 삼자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사탄의 유혹인데 정치인들은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주장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상대의 주장은 사탄의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일부 정치하는 종교인들이 가담합니다. 국민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오히려 종교인들의 정치참여가 이러한 상극의 정치를 부추깁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는 칭찬과 격려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의 추함만이 존재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지금의 옳음이 내일은 그름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여당의 논리가 맞지만 내일은 야당의 논리가 맞는 일이 한 인간에게서 일어납니다. 정신병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리를 바꾸면서도 일언반구 변명이나 사과가 없습니다. 정신병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정신병자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신뢰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황의 논리에 따라서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됩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자신의 세속적인 이해에 따라서 변하는 그러한 사람을 두고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총체적인 불신의 사회에서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격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오는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강한 자가 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라오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줄 강력한 함과 구름을 타고 천사들의 호위 속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 메시아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셨습니다. 화려함으로 오실 수 있는 그분이 왜 그렇게 힘없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비움과 나눔의 삶의 실천입니다. 비움과 나눔이란 바로 사랑과 포용의  삶입니다. 이 삶을 통해서 증오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는 곳에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만이 절망의 관계에서 희망의 관계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배신하더라도 용서를 청하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은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통해서 이 불신의 사회를 어떻게 신뢰의 삶으로, 절망과 분노가 지배하는 이 사회를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로 바꾸어 갈 수 있는지를 배웁니다. 기득권을 가진자가 좀 더 강한 사람이,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먼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따뜻한 삶을 내 자신부터 실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총체적인 불신의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나를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세속적인 욕망과 삶의 논리가 이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논리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구체적인 삶의 논리는 어쩌면 마태오 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의 진복팔단을 실천하는 삶일 것입니다.

폭력과 불신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삶의 논리가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겸손과 비움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러한 삶만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증오의 폭력이 난무하는 죽음의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원한 삶의 세상으로 이끌어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하루, 남을 탓하지 이전에 자신부터 주님 안에서 언행일치를 살아갈 수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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