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21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우시는 예수님(루카 19, 41-4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 34)
오늘 아침에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 보시며 슬퍼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세상의 왕으로 생각하며 환영하던 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 평화의 도시의 미래의 운명 보시고서 눈물을 흘리시며 안타까워하며 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의 차이는 어디에서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야망과 사명의 차이이며, 섬김과 지배의 차이이며 이기심과 사랑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을 쫓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나를 두고서도 이렇게 안타까워 하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셔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가 루카복음 13, 3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들을 돌로 치며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그 자녀를 모으려 해도 그것을 원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신과 불순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갈수록 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들의 가려진 눈은 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귀는 듣지도 못합니다. 결국 이들의 굳은 마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 당신의 운명을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품으시고 돌보시려는 하느님의 그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끝내 거부하고 외면하며 거역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 하시며 우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심판과 무서운 재앙 때문에 마음 아파 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통은 애통으로 그치지 않고 준엄한 심판과 파멸의 경고로 이어집니다. 35절을 봅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9장 43에서 44절에서는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 집”과 “너”라고 표현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과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경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찬송을 받으시며 다시 오실 종말의 때에야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루카 14, 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다짐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시고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시고 대견스러워 하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