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512
2015년 11월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요한 2, 13-22)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요한 2, 16)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쉽습니다. 세례만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는 그 열정이 나를 집어삼켜야 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의 집을 세상적인 욕심의 충족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성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 다시 원래의 하느님의 모상으로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세 번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시고(2,13; 6,3; 11,5), 그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첫 번째로 오늘 복음에서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들은 3대 축제일이 되면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먼 길을 소나 양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먼길을 끌고 오는데 이렇게 먼 거리를 끌고 오다보면 제물로 바칠 소나 양이 병들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흠없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먼 거리를 흠없는 제물을 갖고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앞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면 편리하기도 하고, 흠없는 제물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제물용 짐승들을 파는 상점들과 장사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환전상들인데,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로마 화폐인 드라크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앞 면에는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카이사르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돈을 하느님께 바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사르 자체가 신으로서 숭배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카이사르의 얼굴이 그려진 돈을 드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 깨끗한 돈을 바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변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초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던 마음에서 이제는 자신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이 이해를 따지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먼저 제물이 흠이 없는지를 판결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권한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보기에는 흠이 없는 짐승을 갖고 왔어도 제사장들이 거부하면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조금 흠이 있지만 제사장이 동의하면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시장이나 성전 밖에서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이 허용된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상인들 사이에 검은 거래로 성전 안으로까지 들어와 성전 뜰에서 제물용 짐승들을 팔고 성전세를 환전해주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채찍을 드셨고, 장사판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분노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람들이 말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분노하셨고,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 16) 하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분노를 드러내십니다.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시장으로 변질시킨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을 시장을 변질시키는 것에는 인간이 하느님이고자 하는 마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돈의 노예로 내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바로 성전인 우리자신을 타락시키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전을 성전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열정이 나를 집어 삼키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