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45
2016년 4월 13일 수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상(요한 6, 35-40)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 3)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39-40)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바라보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스테파노가 죽음을 대면하는 태도를 묵상”하게 하십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그의 모습은 사제로서 살아가는 저에게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반성하게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제의 사도행전의 스테파노의 이야기와 과 요한복음 6장이 계속됩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에서 60절은 보면 스테파노가 순교하는 장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전하고 있는 스테파노의 죽음의 모습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사도 7장 59절을 보면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고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 46)하고 바쳤던 기도와 거의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잠들었다(사도 7, 60)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하고 바치셨던 기도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스테파노는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실천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40)는 말씀이 스테파노를 통해서 우리에게 확신으로 다가오게 합니다. 스테파노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면서 잠드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희망하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교회에 큰박해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의 사업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갑니다. 이들은 흩어진 곳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6, 4). 박해를 통해서 교회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교회는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순교의 피는 패배의 피가 아닌 하늘나라의 월계관을 쓰는 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순교의 피는 바로 세상을 이기는 피인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영원한 삶을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이 이렇게 실현됩니다.
사울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교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스테파노에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그를 성 밖으로 끌고가 돌을 던질 때 함께 했던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 7, 58)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사울이 권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울은 스테파노의 죽음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는 교회를 없애기 위해서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넣었습니다(사도 8, 3).” 는 보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모습에서 극단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사울의 이러한 열정을 당신의 교회를 옹호하고 확장시키는 열정으로 변화시킬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셨나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 8, 28)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내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에 죽으면 그 순간에는 죽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한사람의 인내와 겸손함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경우가 많음을 체험합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나를 위해서 살고자 하면 하느님께서 죽이시지만 내가 하느님 때문에 죽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오를 하루를 시작하면서 스테파노가 주님의 품에 안기는 최후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삶, 성체성사의 일상화가 바로 우리을 이러한 모습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러삶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