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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19 22:44
   세례자 요한의 잉태예고 (루카 1, 13) -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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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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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246

2014년 12 월 19일 금요일

세례자 요한의 잉태예고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 1, 13)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믿음의 양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간절히 하느님께 청하면서도 그 청원이 들어지면 당황하기도 하고 의심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겠지요.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헤로데 시대입니다. 이 헤로데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4년사이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헤로데 대왕을 말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기에 수많은 폭정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폭정 중의 하나는 바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수 많은 예수님 탄생 전후로 태어난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게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였고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라고 알려 줍니다. 따라서 엘리사벳도 사제집안의 딸이었슴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둘은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이들이었답니다. 따라서 당연히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서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아이를 가지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을 했고 동시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고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이들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고유한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에 의존하면서도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날 때는 다시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 판단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즈카르야의 모습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동안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 13) 라고 알려줍니다. 이들의 청원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즈카르야는 자신과 부인의 인간적인 한계를 제기하면서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즈카르야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실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확신과 믿음이 부족합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성에만 의존하는 인간에게는 믿음이 존재할 자리가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바로 너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니.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아.’ 하고 부추기면서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인간 이성의 너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이프로의 믿음이 부족한 나의 모습입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이 나의 위안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이 나의 부족한 믿음을 보는 거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기를 지내면서 제가 읽고 감동을 받았던 어떤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말씀하신 한 일화가 생각이 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성전은 깨어진 벽돌 더미와 유리조각만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남은 것이라곤 절망과 상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새로운 성전을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매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전공사를 시작하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벽돌과 유리 조각 더미 속에서 성전에 모셔져 있었던 큰 십자가가 발견된 것입니다. 두 손만 떨어져 나갔을 뿐 다른 곳은 상처 하나 없이 침묵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안배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신자들은 다시 복구된 성전 중앙에 두 손이 없는 십자가를 그대로 모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조각가 한 사람이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두 손이 없는 예수님께 새로운 손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손이 없는 그 십자가를 그대로 모셔두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이 잘린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손’이 되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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