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강론
탕자의 비유 루카 15장
03/10/2013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때에는 이 비유에서의 관심은 작은아들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이나, 그의 회개에 있다기 보다는 돌아오는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 불평하는
큰 아들을 설득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15장 전체적인 관점에서 더욱 어울리는
해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5장의 시작부분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장면을 보고 투덜거릴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의문에 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첫 비유는 양 백마리 가운데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리양을 찾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
비유는 은전 열 닢 가운데서 잃어버린 한 닢을 찾는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되찮은 아들의 비유’는 세번째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
비유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답을 주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과 은 한닢을
잃어버리고 찾는 어떤 부인의 모습과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상속재산을 먼저 취하고서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좀 더 관심깊게
살펴보면, 위의 두 비유는 비인격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는 주인이 찾아 나서십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존재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은 인젹적인
존재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결단을 존중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을 찾아
나서시기도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결단이 아닌 외부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서 일어난 경우에는
위의 두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은 바로 상호 간의 ‘기다림의 사랑’이라고 할 수 가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주고 찾아나서야 하는 그러한 사랑보다는 휠씬 고귀한 사랑입니다.
아들이 나갈 때는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행동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나갔다가 온갖 방탕한 생활로 갖고 있던 재산을 탕진하고 수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통해서 깨어져서 당연시 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은혜를 알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돌아온 아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은혜를 모를 때는 잃어 버렸던 아들이었습니다. 당연지사로 살 때는 죽은 아들인데 은혜를 깨달아 알고 은혜를 찾아 들어오는 자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 된것입니다.
내가 빈 손 들고 벌거벗었을
때 돌봐주시고 입혀주시는 은혜가 감격적이고 감사하여 그 은혜가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겨보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깊으신 사랑에 감사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느껴보는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