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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30 12:20
   연중 제 18주간 미사 (루카 12, 1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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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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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8주간 미사

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이냐시오 성인 축일에(루카 12, 13-21)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새 3, 9-10)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오늘은 주일이기 때문에 축일을 지내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회 창립자이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축일입니다.  모든 예수회원들과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에 대해서 굿뉴스에서의 소개를 퍼와서 소개해 드립니다.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보다 더 귀하고 높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슴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돈이 이제는 인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가족들 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 분란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돈 때문에 깨어지는 많은 가정들을 보게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가 소유한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는 하지만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평화를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제공자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물질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필요해서 추구했던 물질이 어느순간에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있슴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물질로부터 자유하고자 노력하지만 한번 물질에 길들여진 존재가 물질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움을 깨닫습니다. 

주변을 둘러 봅니다. 모두들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긍정과 희망의 언어보다는 절망과 부정의 언어가 대세인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기에  사랑이 그리워 지는 시기입니다. 사랑의 종류를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사랑의 종류를 구분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어려운 시기이기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배우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랑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에는 상처투성이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해서 꼭 결혼으로 골인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을 하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드물지 않게 보아 오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결혼생활 역시 행복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그렇지 못한 경우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사랑이 식어 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긴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께서 더 잘 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그려 봅니다. 어떤 특정한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분입니다. 이분의 삶을 묵상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단순한 삶을 살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시기를 지내고 있으면서도 밝음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살아가는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시기에는 밝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둠에서 빛을 발견하는 유일한 삶의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을 다짐합니다. 물질의 노예로서의 삶이 아닌 물질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한 사람이 되고자 다짐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그분의  참 모습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새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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