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4주간 일요일
2016년 12월 19일
환상적인 인간관계의 모범(마태 1,18-24)
20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 20-21)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옵니다. 두 복음서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탄생기사를 다룸에 있어서 마태오 복음은 요셉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루카 복음서는 성모님께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저자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따라서 그리고 신학적인 관심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이 복음서들이 쓰여진 이후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들 복음서를 읽으면서 왜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다르게 알려주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지식의 틀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 할려고 합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을 유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열어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의 고정된 틀안에서 이해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 이해할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과 사랑이 담겨진 성경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기도와 묵상과 이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해되고 해석될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마태오 복음 사가가 요셉에게 촛점을 맞추고 루카 복음사가가 성모님께 촛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의 탄생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이 체험하게 해 줄 것이라는 학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이 마리아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라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탄생하셨는가를 알려 줍니다. 마리아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였는데 그들이 함께 살기도 전에 성령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전합니다. 이 사실을 요셉이 알게 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남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노아의 세 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술에 취하여 옷을 벗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형들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형들은 아버지의 그 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아버지 취한 모습을 덮어주려고 합니다. 남의 약점을 공개하는 사람보다 그 약점을 감추어주고 덮어주는 마음을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마리아의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이니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까지 ‘예수’라 하라고 알려 줍니다. 이일들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려주신 ‘동정녀가 잉태를 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임마누엘’ 이라고 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자의 탄생의 배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요셉에게서 몇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약혼녀가 자기와 전혀 상관없이 아이들 가졌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입니다. 화도 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약혼녀를 먼저 생각합니다. 당시의 법대로라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었지만 요셉은 자신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자신의 약혼녀를 배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참 사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 아름다운 요셉의 마음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의로움’이란 당시의 율법에 충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셉은 율법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슴을 복음서는 강조합니다. 이제는 그 법적인 ‘의로움’이 ‘하느님의 관점에서의 의로움’으로 바뀌어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함에 있어서 의인으로의 변화입니다. ‘젊은이는 규칙을 알고 노인은 예외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의 의로움이 바로 판단의 의로움이었으면 이제는 사랑의 의로움으로 예외를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순간임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천사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의 이름마저도 자신이 짓지 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 즉 하느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을 쓰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마저도 행사하지 못하지만 요셉은 그것마저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이 바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데 있어 성모님의 위대한 신앙의 선택과 더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요셉을 통해서 이 세상이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받을려고 하는 축복이 아니라 남에게 복을 주는 축복을 받은 분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요셉성인의 의로움이,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 되는 한 주간이기를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