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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04 01:36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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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864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8)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①

하느님 의지하며 청빈의 삶 살아

거상의 아들로 태어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주님의 음성 듣고 자선하며 가난의 길 걸어

발행일 : 2010-07-04 [제2704호, 12면]

참으로 유명한 분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성인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성인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개신교 신자들도 공경하는 성인이다.

유명한데는 이유가 있다. 감동이 그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cus Assis, C. 축일 10. 4)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영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이제 그 감동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다. 아버지 베드로 벨라도네는 프랑스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거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 세계를 다니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자였으니 당연히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라틴어, 프랑스어도 배웠다. 

부잣집 도련님들이 대부분 그렇듯 프란치스코는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했다. 돈을 물같이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거나 냉혹한 성격은 아니었다. 꽉 막힌 성격도 아니었다. 돈 많이 쓰고, 인심 좋은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자연히 프란치스코 주위에는 놀기 좋아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세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내심 흡족해 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온다. 영웅심 가득했던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될 꿈을 안고 한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부다. 아버지는 엄청난 보석금을 내고 아들을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왔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의 삶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한동안 큰 병을 앓았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로 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고, 자주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선을 하면서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다 쓰러져 가는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었다. 그때 갑자기 십자가상 그리스도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이는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말씀이었지만 당시 프란치스코는 ‘그 집’을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성당은 당장 수리가 필요했다.

프란치스코는 즉시 성당 수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집에서 귀중한 물건을 빼내와 판 뒤 그 돈을 성당 사제에게 내놓으며 수리비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신부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프란치스코는 돈을 성당 창문 안으로 던져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여행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크게 분노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바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쯤 되자 아버지의 화가 극에 달한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좁은 구석방에 가두고, 자신이 직접 성 다미아노 성당에 가서 돈을 되찾아 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재산을 모두 성당에 기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주교 앞으로 끌고가 아들이 더 이상 미친짓을 하지 않도록 충고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생긴다. 훌훌 벗어 던졌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주었다.

완벽한 가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는 이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진정한 청빈의 삶을 살았다. 아무것도 갖기를 원치 않았다. 의복도 항상 해어진 남루한 것만을 원했다.

특히 1209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 참례 당시 성서에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고 식량 자루도, 여벌옷이나 신도, 그리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일하는 사람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마태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는 더욱 더 청빈의 삶에 정진했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9)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②

주님을 따르기 위해 청빈·보속의 삶 살아

교회에 순명하며 깊은 신앙으로 신자들 이끌어

갈수록 많은 수도자들 동참… 수도원 날로 성장

발행일 : 2010-07-11 [제2705호, 10면]

신선한 충격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청빈 선언은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교회와 민중들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세 명이 프란치스코의 삶에 동참하겠다며 찾아왔다. 

그 세 명 제자는 퀀타바레의 벨라노라는 상인, 순박한 성격의 에지디오, 법학자 카타니의 베드로 등이다. 이후 제자의 수가 차츰 늘어 열 둘에 이르게 됐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해서, 교회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다. 철저히 교회에 순명했다. 교회 전통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섭리에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몰려들면서 수도원 설립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서 수도회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청원했다.

교회는 신중했다. 특히 너무나도 엄격한 청빈 생활 때문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의 요청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과연 하느님에 의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교황은 꿈을 꾼다. 꿈에서 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교회를 떠받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교황은 즉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회칙을 인준, 수도회를 강복하고, 일반 신자들에게 강론할 사명도 그들에게 맡겼다.

이제 프란치스코가 꿈꾸던 공동생활의 기틀이 마련됐다. 베네딕토회로 부터 받은 아시시 근처에 있는 포르찌웅콜라라 불리는 소성당과 그에 부속된 약간의 토지도 얻었다. 프란치스코가‘작은 형제회’라고 명명한 새로운 수도원이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영적인 힘이 있는 수도회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장하는 법이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뜻에 동참했고, 그에따라 분원도 계속해서 늘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잡음이 일어날 법 한데, 작은 형제회 회원들은 어디에서나 청빈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로 많은 이의 공경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여성들에게도 파급된다. 클라라라는 명문가 출신인 한 처녀가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깊이 감동받고, 청빈과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며 찾아왔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보수공사를 마친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 한 채의 집을 클라라에게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성들도 프란치스코의 삶을 따르겠다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녀의 동생 아녜스도 언니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자 수도회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고, 클라라가 초대 수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수도자들처럼 모든 욕망을 끊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사람 이 외에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위해 제 3회를 창립했다. 이들 중에는 귀족, 서민, 농민 등 빈부귀천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프란치스코는 자주 병을 앓았다. 수많은 설교와 자청한 고난 등이 문제였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라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수난과 절대 고독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엄격한 고행으로 인해 그의 몸은 나이 보다 더 빨리 쇠약해져 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큰 고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1224년 어느 날, 그가 산에 올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 친히 양손, 양발 옆구리에다 오상을 박아 주었다. 큰 은혜임은 틀림없었으나, 인간적 차원에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참으로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기적을 끝까지 숨기려 노력했다.

1226년 9월에 이르러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교회로부터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 그는 사람들에게 “나를 맨바닥에 눕혀라”고 했다.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경 중 예수 수난에 대한 구절이 낭독됐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편을 읽었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 그분 앞에 내 근심을 쏟아붓고 내 곤경을 그분 앞에 알리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성자의 나이는 44세였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0)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③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 살기 위해 노력

주님 형성하신 가치 깨닫고 전환점 맞아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하느님께 순명

발행일 : 2010-07-18 [제2706호, 12면]

성 프란치스코는 1182년에 태어나 1226년에 선종했다. 칭기즈칸이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 시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44년을 살았다. 짧은 삶이다. 청년이 될 때까지는 하느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가 하느님과 일치해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프란치스코가 진정한 신앙의 모델로 변모 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프란치스코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 풍요로움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지만 때로는 삶의 독이 되기도 한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게 지냈다. 불편을 몰랐던 성장기다. 돈도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썼다.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진정한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형성되도록 창조하셨는데, 풍족하면 이러한 하느님의 형성의 섭리를 실현시키기 힘들다. 그렇게 프린치스코는 20세가 될 때까지 반형성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삶의 전환기가 오게 된다. 이제 드디어 형성적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전쟁터에 가서 포로가 됐다가 어렵게 풀려났고, 나중에는 큰 병도 얻었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섭리는 이렇게 오묘하다. 공부도 많이 시켜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었고, 감옥에서도 빼내어 주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때까지 하느님의 형성시키는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큰 병을 통해 조금씩 신비스러운 어떤 힘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병을 앓는 것도 어떤 때는 큰 은총이다. 고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특별히 그렇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미리 형성시켜 놓으신 그 형성을 하나 둘 재형성하고 초형성하는 노력을 통해 완성해 나가게 된다.

하느님을 느끼면 사람은 변화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방법과는 조금 다르게 돈을 쓰기 시작한다. 예전처럼 흥청망청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그리고 성당을 보수하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돈이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심지어 다락방에 가두기도 했다. 이때 프란치스코가 보인 반응이 놀랍다. 은총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은총도 보통 은총이 아니다. 옷을 다 벗는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내놓고 “아버님 가져가세요”한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이제부터 프란치스코는 온전히 하느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움을 퍼트리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수도회가 설립됐다. 훗날에는 병중에서도 오상을 받고 그리스도와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진정 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삶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의 보화는 우선 ‘단순함 의성향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잡하게 산다. 욕심 때문이다.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물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가난하면 영적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 하나를 버려서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보화는 ‘순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순명이라고 하면, 부모님에 대한 순명, 수도회 장상에 대한 순명 등을 떠올린다. 물론 이런 순명도 순명이다. 하지만 낮은 단계의 순명이다. 진정한 순명은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순명은 무조건 윗사람에게 “예”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물론 자녀보다는 부모의 뜻이 90% 정도 옳을 수 있다. 수도회 장상의 뜻이 90% 더 옳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른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순명으로 보이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높은 단계의 순명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완벽한 순명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께 순명한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참으로 높은 경지의 순명을 본다. 그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불순명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는 온전히 순명했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1)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④

지상에서 천상의 삶 사신 위대한 성인

주님 당하신 고통 겪으며 완벽한 일치 추구

순명과 기도로 부·권력에 빠진 교회 일으켜

발행일 : 2010-07-25 [제2707호, 10면]

매 순간 순간이 중요하다. 밥 한끼 먹을 때도 중요하고, 잠잘 때도 중요하고, 공부할 때도 중요하다. 살아서 숨 쉬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인생 공부를 제대로 매 순간마다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마련해 놓으신 형성적 원리를 성취해 낼 수 없다.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그 모범을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본다. 그 중 하나가 순명이다. 프란치스코는 늘 매 순간의 삶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았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보여주신 것,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위해 절대 순명하며 살았다. 이러한 순명의 삶이야말로 프란치스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덕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또 다른 모범을 꼽으라면 기도 생활을 들 수 있다. 사실 청년기의 프란치스코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방탕하게 살았고, 세속적 행복에만 매달려 살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기도하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첫 번째 계기는 중병을 앓았을 때였다. 사람은 아프고 고통 받으면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하느님께 매달린다. 어쩔 수 없이 매달린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다. 프란치스코도 그랬다. 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도생활은 이처럼 시작이 중요하다. 일단 시작해야 하느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기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러나 단순히 ‘시작’의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때도 계기가 있었다.

기도생활을 시작하고 또 열심히 기도를 하다보면 내적이든 외적이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차원 높은 관상으로 가는 체험들이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관상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제는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다.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이 음성이 프란치스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프란치스코의 기도생활의 경지는 점점 더 깊어만 갔다. 27세의 청년이 마태오 복음을 묵상한다. 예수님이 12사도를 파견하는 대목이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마태 10,8-9)

이 말씀은 평생동안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라다녔다. 게다가 성경을 단순히 읽고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완벽하게 삶으로 실천해 낸다.

성경 말씀에 대한 관상에서 더 넘어가자 하느님은 이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오상의 은총을 베푸신다. 오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생긴 두 손과 두 발의 상처와,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요한 19,34)를 말한다. 프란치스코에게도 똑같은 상처가 생겼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똑같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이는 성인이 예수님과 완벽하게 일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완벽한 기도는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일치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치는 선종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을 앞두고 “땅에 뉘어 달라”고 했다. 땅의 품에, 자연의 품에 안기겠다는 참으로 낮은 모습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세계 형성의 관점에서는 예수님 다음 가는 존재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부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고 있던 교회를 청빈과 단숨함, 순명, 기도의 완성을 통해 다시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교회의 초월적 변화를 이끌었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위대한 성인의 삶을 짧은 지면에 옮긴다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다. 그만큼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위대하다. 그는 지상에서 살았지만, 가장 완벽하게 천상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이다. 이 짧은 내용이나마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의 영혼에게라도 자극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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