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아울러 주재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최상의 경신례, 절대적인 존경을 흠숭(欽崇)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인간에 대한 존경은 공경(恭敬)이라고 하여 명확히 구별한다.
예컨대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된 동정 성모 마리아는 피조물 중 덕으로나 지위로나 가장 탁월한 분이기에 특별한 ‘공경’을 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경이지 흠숭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인에게 우리는 어떠한 공경을 바쳐야 할까.
세상 사람들은 조국을 위하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영웅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 또한 빛나는 발명이나 발견을 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킨 이에게도 모든 이들이 존경을 보낸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고, 세상에 큰 선익을 선사하고, 인류의 명예가 되는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생전 모습을 성화와 성상으로 표현해 기념하고, 붓과 입으로 찬양드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성인에 대한 공경 중에서도 그 유해(遺骸)나 유골, 유물, 성상, 성화 등을 존경하는 것은 어딘가 특별한 가톨릭적 정서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공경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미신이 아니다. 인정(人情)상으로 말하더라도 돌아가신 부모를 잊지 않는 효자는 아침저녁 그 사진을 향하여 산 이에게 하는 것처럼 인사한다. 효자는 특히 부모의 유산이나 기념물 등 고인을 추모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성인에 대한 공경도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와 관계되는 일체의 사물에 대한 존중에까지 진지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성인들의 전구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들이 직접 하느님께 의뢰하는 것보다 성인들의 전구를 통해 구함을 받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점은 용이하게 납득할 수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상대편에 가까운 사람을 중개 삼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성인들은 우리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영복을 누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돕고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는 것을 천국에 있어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인들의 전달을 기뻐하시며 반드시 그들의 원의를 들어 주실 것이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6)
천국의 성인은 지상의 의인보다 주의 사랑 안에 더 깊이 있다.
따라서 성인의 기도는 의인의 간절한 기도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모든 성인의 전달이 일체 사물에 관하여 어느 것이든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심 생활이나 선한 임종을 하기 위해서는 성 요셉, 전교를 위해서는 성녀 소화 데레사, 유실물(遺失物) 발견을 위해서는 성 안토니오의 전구가 특별히 유력하다.
이와 같이 성인에 의하여 기도의 효과가 다른 것은 그네들의 생존 시에 특별히 공훈을 세운 방면에 하느님께서 그 보수로 탁월한 전구의 힘을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성인을 결정하고 발표하는 주요한 이유는 단순히 전구에만 있지 않다.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주기 위함이다. 결국 성인 공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성덕을 본받는 것이라 하겠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격언이 있다. 시간 있는 대로 성인전을 읽으며 가끔 그들의 생애를 묵상하며, 기도 중에 그들과 친밀히 지내야 한다. 그러면 어느덧 그들의 고결한 정신에 동화되어 마침내 거룩한 삶을 구현할 것이다. 열심히 분발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외치자.
“그도 한때 사람이었고 나도 지금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행한 것을 나라고 행치 못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