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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20 19:5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38>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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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3,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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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38>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가난한 이들' 의 관점에서 시작된 '해방신학' , 문을 열다


가난한 이들의 변호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흔히 '해방신학의 선구자' 혹은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런 칭호들은 그의 신학적 일생과 지향에 비추어봤을 때 그저 부수적 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의 신학적 근본관심사는 단순히 신학적 성취나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정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신학적 화폭에 그려내고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삶과 해방실천에 기초한 관점이 구티에레스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저술들 역시 바로 이런 관점이 녹아들어 씌어졌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귀여겨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의 신학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또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생애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1928년 6월 8일 페루의 리마에서 케추아족 혼혈(메스티조) 부모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걸린 골수염 때문에 수년간 병고에 시달렸으며 결국 한쪽 다리에 장애를 입어 절게 됐다. 1947년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리마의 산 마르코 대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면서 정치동아리에 참여해 정치현실에 눈뜨게 된다(1947-1950). 


 그러나 졸업 후 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갖고 진로를 바꿔 사제로 살기로 결단해 페루 리마의 가톨릭 신학교와 칠레의 산티아고 신학교에 입학해 잠시 수학한 후, 유학길에 올라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1951-1955),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다(1955-1959). 1959년 사제로 수품한 후 1년간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한 후(1959-1960) 귀국해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리마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리마의 빈민지역 리막(Rimac)에서 사목생활을 병행해 가난한 이들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과 구조적인 불의에 눈뜨게 된다. 1974년에는 리마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라스 카사스 센터를 설립했다. 


 1985년에는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유럽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93년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98년에는 그의 해방신학에 큰 자극을 준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를 비롯해 프랑스 유학 중에 교류했던 콩가르(Y. Congar), 세뉘(M.-D. Chenu), 쉴레벡스(E. Schillebeeckx)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회원들의 영향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구티에레스는 유럽 여러 대학교와 미국 노틀담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왕성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배경


 구티에레스의 신학에 큰 자극을 주었던 교회적 사건으로는 특히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자신이 신학자문으로 참여했던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를 언급할 수 있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교회를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시대 안에서 인간들의 열망과 하느님 현존과 계획의 징표를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해 응답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들은 남미의 구체적 현실에 대답하기에는 미흡했으며 일반론적 서술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지녔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 교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큼 새로운 전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메데인 회의(1968년)는 비참하고 불의로 가득 찬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교회가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교회 쇄신의 방향을 더욱 뚜렷하게 제시했다. 


 메데인 회의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전면적인 해방, 온갖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인격적 성숙, 집단적 통합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 들어 서 있다고 진단하면서(메데인 문헌: 서문 4항)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라고 부를 불의의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으로 규정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한다. 그런 곳에서는 주님 자신조차도 거부된다"(메데인 문헌: 평화, 14항)고 천명하였다. 아울러 메데인 회의는 인간을 온갖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메데인 문헌: 정의, 3-5항 참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메데인 문헌 : 교회의 가난, 9-11항 참조)를 강조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메데인 회의의 구체적인 육화라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신학에 결정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구티에레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남미의 불의한 현실을 이해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로이 숙고하게 한 결정적 동인이었고 해방신학의 일차적 산파였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일차적 대화자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16세기까지 거슬러가는 해방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는 정복자의 관점을 극복하고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언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였던 라스 카사스 16세기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 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복음을 증언한 '가난한 인디언의 변호인'으로 일컬어진다. 16세기 당시 라틴 아메리카 상황을 지배했던 신학은 남미의 인디언 정복과 불의한 착취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던 억압과 정복의 신학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인간의 자연성에 따라 애초부터 종의 처지로 태어났고, 이들의 주인으로 태어난 유럽인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이 신학은 인디언들을 복종시키고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가피하다고 보고 인디언에 대한 억압과 착취, 노예화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이에 대항해 라스 카사스는 인디언들 역시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이며,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예로 간주되고 있는 인디언들은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롭게 돼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복음화도 불가능하다고 봤다. 진정한 복음화는 오로지 자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구원은 정의와 불가분한 것으로 여겨 당시 사회경제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엔코미엔다(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국왕이 하사한 토지)를 철폐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라스 카사스의 신학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인디언들이 단순히 복음화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화의 주체임을 간파한 것이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인디언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보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인디언들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는 점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구티에레스가 라스 카사스를 해방신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보고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여정에서 깊이 천착하고 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구티에레스는 라스 카사스 대한 연구서들을 출간하기도 했다(특히 「라스 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1992). 


주요저술


▲ 구티에레스 저서 「해방신학」 번역본(왼쪽)과 영어판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구티에레스의 주요 저술로는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의 선구적이고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신학」(1971: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이 있다. 본격적인 해방신학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1968년 페루의 심보테(Simbote)에서 해방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최초의 강연에서 비롯됐고, 남미 해방신학의 대헌장(Magna Carta)으로 여겨진다. 그 후에 전개된 남미 해방신학의 대부분은 이 책을 인용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정권 시절인 1977년에 성염의 번역으로 출간돼 교회 안팎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이후의 저술들은 근본적으로 「해방신학」의 근본 관점을 다양한 맥락에서 심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저서로 「가난한 이들의 역사적 위력」(1979),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1983), 「욥에 관하여」(1986), 「생명의 하느님」(1989), 「라스 카사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1992: Las Casas: In Search of the Poor of Jesus Christ)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구티에레스의 오랜 벗이요 현재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이기도 한 게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Gerhard Ludwig Muller) 추기경과 2004년에 공동으로 출간한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해방신학」(On the Side of the Poor: The Theology of Liberation)이 있다. 


구티에레스 신학의 핵심 관점과 지향


 신학의 근본 문제는 각기 다른 인간 삶의 맥락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하고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에게 '사랑의 하느님을 남미 상황에서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혹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수난에 직면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된 것은 지극히 마땅한 것이었다. 그의 해방신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관점과 지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처한 불의한 상황,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중남미 대륙과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갖가지 형태(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인종ㆍ종교)의 종속과 소외, 사회계급 사이의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 지배집단의 억압과 가혹한 탄압, 경제적 신식민주의 등과 같은 '제도화된 폭력이라 부를 불의한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해방실천 없이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구원은 기대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해방실천(praxis)과 그 경험으로부터 신앙을 이해하고,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성찰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은 단순히 지적이고 신학적인 독창성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의 세상 속에서 해방을 맛보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실천에서 솟아나는 신앙체험과 신앙 감각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충실하게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티에레스의 주저 「해방신학」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셋째, 이런 맥락에서 구티에레스는 신학적 성찰과 행위를 신앙실천에 뒤따르는 이차적인 것으로 본다. 신학의 일차적 행위는 해방의 역사적 실천에 참여하고, 그와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구티에레스는 진정한 신학(자)의 기준은 해방의 역사적 실천에 동참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곧 해방실천에 동참하여 숙고되고 반성된 신학이 올바른 신학이라는 것이다(「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109, 178 참조). 이런 관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은 그저 세상을 고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전망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며, 세상의 변혁과 인간 역사의 변혁의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와 전망을 담고 있는 신학이다. 이렇게 볼 때, 남미의 가난한 이들의 시선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는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의 근본 지향은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인간 해방을 위해 투신하도록 초대한다는 데 있다. 


 넷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적 논의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상으로 선사하는 해방의 복음이 신앙 이해와 해방실천을 위한 해석의 원리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느님, 역사와 신앙, 인간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의 상호관계를 순환적인 관계에서 바라보게 하는 해석의 원리라는 것이다.


 다섯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사목 활동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비롯됐다. 그의 해방신학은 단순히 책과 책 사이를 오가는 사변적인 순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목적인 행위와 관련해 탄생했다. "나는 1960년대 유럽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페루로 돌아와서 사목 일을 시작했지요. 제 일은 곧 남미적 문제와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사목 일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의식으로 깨어났고, 그들의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있던 집단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의 나눔과 공동체의 삶 그리고 우리나라 안에서나 밖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가까워짐,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각성시킨 것입니다.…나의 접근방식은 근본적으로 사목적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은 사목으로부터 발전했습니다”(페터 아이허, 「해방신학을 말한다」 27).


 여섯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복음화와 해방의 주역이 돼 자신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역사 안에서 행한 해방실천에서 얻은 그들의 고유한 신앙체험과 가치들이 존중받는 것이다. "최후로 정말 올바른 해방신학이 정립되려면 피압제자들 스스로가 사회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발언권을 가지고 자유로이 의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네가 지니고 있는 '희망을 해설하며', 그들 스스로가 자기네 해방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해방신학」 339). 



 해방의 의미


 해방(liberation)이 구티에레스 신학에서 중심 개념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개발(development) 이데올로기가 지닌 허구와 그 폐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1950년대 남미에 집중된 부강한 국가들의 개발원조는 큰 기대를 갖게 했으나 실상은 빈곤한 국가들이 처해있는 빈곤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저개발로부터의 해방에 실패했고, 개발정책은 오히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예속과 종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빈곤한 국가들의 종속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큰 우려를 표명했다. 「사목헌장」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들과 개발도상국들의 격차는 날로 커져가고 흔히 경제적 예속도 심화되고"(9항) 있으며, "극심한 불평등과 온갖 형태의 부당한 종속에서 해방되고 심각한 내부 곤경의 위험에서 벗어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85항 참조)는 것이다. 이와 관련, 메데인 회의는 신식민주의의 위험성 또는 제국주의의 폐해와 경제적 독재로부터 빚어진 사회계급의 불평등, 소외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태를 강조했다(메데인 문헌: 평화, 1항-10항 참조). 


 따라서 구티에레스에게 중남미 국민의 대다수를 사로잡고 있는 빈곤, 착취, 인간소외로부터의 해방, 곧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해방은 시급하고 요긴한 것이었다. 아울러 해방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가로막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추구하고 모든 종류의 종속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 곧 '새 인간'으로의 해방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해방은 타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모든 불의와 압제의 근본 원인인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깨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와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도록 자유를 선사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개인적 죄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 실재'인 죄로부터의 해방, 곧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포괄한다. 


 물론 이 세 가지 해방의 차원은 단순히 서로 분리되는 것도, 순차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동시적 국면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치, 경제적 해방은 근원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 비로소 온전한 해방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스의 해방 개념은 후에 1979년 푸에블라(Puebla)에서 열린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수용된다(푸에블라 문헌: 특히 321-339항 참조).

 

 해방의 영성


 구티에레스의 해방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언하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으로 집약된다(마태 22,34-40 참조). "영성은 만인과 연대하여 '주님 앞에서 사는' 길이며, '주님을 모시고' 인간들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다"(「해방신학」 232). 영성이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이웃을 향한 회심', 특히 압제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고 지배당하는 사람들과 민족들을 향한 회심이 이루어지고, 이들의 해방실천을 위한 투신을 통해서다. 이웃을 향한 회심은 구체적으로 불의에 고통당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구조와 상황을 변혁하는 일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존의 사고방식,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과 결별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방법을 달리해 새 인간이 돼야 한다. 구티에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해방의 영성은 '하느님 사랑과 은혜의 무상성'에 대한 깊은 체험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무상성은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실존근거를 이루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건네주는 친교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타인에 대한 무상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인간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온전한 일치를 보여주신 분이다.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는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의 친교에 힘입어 인간 상호간의 친교가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몸소 증언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의 해방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성과 남미의 가난한 이들의 경험과 현실에 기초해 생성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차원에 갇힌 영성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에 이르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령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구티에레스는 이러한 해방의 영성을 자신의 저서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1983)에서 매우 심도 있게 성찰하고 있다.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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