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으니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중략)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이 가난에 완전히 매달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늘 아래서는 결코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마시십시오." (작은형제회 인준받은 회칙 6,1-6)
낙엽이 바람에 어지럽게 휘날리는 늦가을 정원이었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건지, 아니면 숙여서 옆으로 꺾어 본건 지 모르겠지만 앳된 소년의 눈에는 땅과 하늘이 뒤집혀 보였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그 위에 있었다.
소년(프란치스코)이 함께 뛰어놀던 소녀에게 말했다. "저길 봐! 땅을 떠받치는 건 하늘이야."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영상물로는 근작이라 할 수 있는 미첼레 소아비 감독 영화 '성 프란치스코'의 첫 장면에 나오는 이 대사는 꽤나 인상 깊었다.
청빈, 순명의 삶으로 쇄신 바람 불어넣어
성 프란치스코(1181∼1226)의 영혼이 깃든 아시시는 평화롭다. 뇌리에 남아 있는 영화 대사 때문인 것 같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너른 들판과 자욱한 안개 때문에 대지와의 경계가 희미해진 잿빛 하늘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대성당을 향해 서쪽 언덕을 오르면서 골목 안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본다. 고즈넉한 중세풍 골목 어딘가에서 프란치스코의 혁신성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수많은 성인들 가운데 프란치스코만큼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인도 드물다. 어떤 이는 그의 가난한 삶에 감동한다. 그는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진 후 "이제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또 어떤 이는 태양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달을 누나라고 부른 '태양의 찬가'에서 자연친화적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1219년 십자군이 진주한 이집트까지 달려가 술탄(이슬람교 정치 지도자)과 며칠간 대화한 그의 전교여행에서 평화와 공존 원리를 찾는 사람도 많다.
이에 비하면 그의 혁신성은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프란치스코 이전까지 수도자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따라 수도원에 정주(定住)하면서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교황권이 정치권력까지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되자 수도회들도 세속화의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봉건 제후들과 긴밀히 관계하면서 일부 수도자들은 귀족, 특권 계층이 됐다.
일각에서는 "신앙의 가치에 영감을 받은 삶을 세상에 증언하기는커녕, 참으로 반증거와 추문의 행태를 보이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빠져들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정신에서 벗어난"(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제삼천년기」 40항) 모습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제도권 교회에서 이탈하려는 세력이 급증했다. 브레스키아의 아놀드는 성직자 세속화를 비판하면서 "교회는 세속의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사도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카타리(Cathari)파와 왈도(Waldo)파 등은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제도권 교회를 부인했다. 때마침 일반 민중 사이에서 영적 경건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터라 이들의 비판과 도전에 호응하는 무리들은 하나의 종파(宗派)를 이룰 만큼 커졌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고, 교계제도 근간을 흔드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위기에서 "가서 쓰러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일어났다. 소유한 것을 모두 버리고 거친 옷을 입고, 문전 탁발(托鉢)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이상은 당시 이단으로 정죄된 무리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제도권 교회에서 그 이상을 실현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주위로 모여든 형제들에게 "우리의 거룩한 성녀인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라.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하면서"라고 강조했다. 또 어느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다. 다만 복음적 가난을 살아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만을 비판했을 뿐이다.
그가 1209년 수도회 생활양식(회칙)을 인준받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말했다.
"그대가 한 말은 틀림이 없지만 인간 본성은 한 가지 목적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기가 힘드오. 가서 기도하시오. 그대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 뜻이 얼마나 맞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시오."
전통과 혁신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르기 마련이다. 반교회적 풍조와 정치적 힘이 맞물려 있는 혼돈의 시대였기에 그의 혁신적 이상은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교황은 얼마 후 농부인 듯한 남자가 어깨로 쓰러져가는 대성당 처마 아래를 받쳐 세우는 꿈을 꾸고나서 회칙을 인준했다.
이후 작은형제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평민과 귀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성직자와 평신도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마태 19,21),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카 9,3)는 말씀을 따라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나갔다.
사도적 삶에 대한 시대적 갈망과 이단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민중의 종교적 열망이 그의 혁신적 영성 안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16세기 종교분열의 도화선이 된 마르틴 루터와 달리 그는 교도권 권위를 존중하면서 청빈과 순명의 삶으로 쇄신 바람을 불어넣었다.
'제2의 그리스도' 영성 살아 숨셔
아시시에서 눈길을 사로 잡는 것은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대성당에 있는 '성당 안의 성당' 포르치운쿨라(Portiunkula, '작은 몫'이라는 뜻) 경당이다. 초창기에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은 성 베네딕도회에 소유권이 있는 이 작고 허물어진 성당에서 살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무형의 영적 건물을 세워나갔다.(작은형제들은 성당 임대에 대한 사례로 연1회 물고기 한 바구니를 성 베네딕도수도원에 보냈는데,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형제들이 늘어나자 프란치스코는 이 경당 옆에 나뭇가지를 엮어 움막을 짓고 나서 "이게 프란치스칸 집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작은형제회가 경당을 보존하는 이유는 프란치스코가 이 경당이 겸손과 가난의 표징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아시시에서 우연히 마주친 갈티에로(67) 수사는 "수도복을 매는 끈(혁대 대신 맨 흰색 끈)은 프란치스칸의 가난한 삶을 상징한다"며 "하지만 박해지역에서 이 끈에 목 졸려 순교한 프란치스칸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지 800년이 돼가지만 사부 영성은 아시시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한다.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는 언덕 위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터는 원래 사형장이었다. 그래서 아시시 주민들은 '죽음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이 언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 같다"며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 이후로 주민들은 이 언덕을 '희망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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